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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

막내 외삼촌 김유정

막내 외삼촌 김유정

                                                                      생질 유필근

소설가 김유정은 저의 막내 외삼촌이 되십니다.

금년 김유정 사후 79주기 추모제을 맞아 김유정의 이야기를 외가와 친가의 증언을 토대로 정리 하는 시간을 마련하였습니다.

김유정은 청풍 김씨 김춘식과 청송 심씨 사이에서 8남매중 7전째로 1907111일 서울 운니동 저택에서 태여 나셨습니다.

 

김유정의 태몽

저의 외할아버님 김춘식 태몽에 앞마당 한가운데가 쩍 갈라지더니 땅속에서 오색 찰란한 용이 하늘로 솟아오르더랍니다.

용의 비늘 하나하나에 빛나는 방울이 달렸는데 절렁절렁 요란하게 소리가 나더랍니다. 더욱 영롱한 빛을 발하여 눈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로 솟아오르던 용이 땅으로 떨러지며 땅속으로 들어가더랍니다.

외할아버님께서는 그 꿈을 꾸신 후 꿈 해몽을 하시기를 유정이 후일에 유명 해 질 것이나 단명할 것이라 말씀하시고 통곡을 하셨다고 제 모친께서 제의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유정은 부친의 태몽 꿈처럼 찬란한 방울 소리를 내며 하늘로 오르다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시절

유정은 100칸이 넘는 운니동 저택에서 태어났고 태를 갈라 운반 하는 것을 유정의 셋째 누님이신 흑석동 이모님이 보셨다고 전합니다.

유정이 어렸을 때는 왕자 부럽지 않은 대접을 받으며 자랐는데 불행히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유정의 모친은 유정의 나이 7살인 1915318일에 돌아가셨고 부친은 유정의 나이 9살인 1917523일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어렸을 적 횟배 앓이를 하여 외할아버지께서 배만 아프다하면 담배를 피우게 하셨다고 전합니다. 꼬마아이가 긴 담배대를 물고 아버지와 맞담배를 피웠다고합니다.

외삼촌 유정은 조실부모하여 몹시 부모님을 그리워했고 몹시 외로워움을 탔다고 전합니다. 가족들이 아낌없이 사랑을 베풀고 돌봤다고 하나 부모님의 빈자리를 메울 길은 없었겠지요.

큰외삼촌은 어린유정과 항상 겸상으로 식사를 했고 행여 어린 유정에게 조금이나마 소흘히 할까 집안 단속을 엄히 하셨다고 합니다.

또 제사를 지낸 후 젯상 음식의 반을 큰 목판에 담아 계집종들이 맞들어 유정의 방에 갖다 놓았다합니다. 그러면 어린 유정이 아래 것들에게 나누어주고 친구분들에게도 나누어 먹었다합니다.

큰외삼촌은 유정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시고 흡족해 하셨으며 동생 유정을 무척이나 아끼셨다합니다.

 

윗대 할아버지가 부원군

유정은 운니동 집에서 태어나셨다 합니다.

운니동 집은 크고 넓어서 유정의 모친의 세칸(목욕탕)이 따로 있어서 아랫것들이 더운 물을 떠다 바치면 세수도 목욕도 혼자서 세간에서 하셨고 따님들도 어머니의 속살을 보지 못하셨다고 저의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외할머니는 무척이나 예절 바르시고 깔끔한 분이라고 전하셨습니다. 평소 남치마에 흰 저고리를 즐겨 입으셨으며 외할머니가 대청에 나오시면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듯 우아하셔서 우러러보았다합니다

신하의 집은 99칸을 넘으면 아니 되는데 그의 웃대 할아버지가 부원군을 지내셔서 특별이 100칸이 넘는 집을 허락하셨다 합니다.

나랏님이 춘성군과 홍천에 많은 땅을 하사하셔서 부자로 사셨다합니다

저의 어머님이 부자는 3대를 가는데 유정의 집은 5를 부를 누렸다고 하셨습니다.

큰외삼촌은 살림을 서생에게 맡기고 풍류의 재산을 낭비 하신 듯 합니다.

집이 넓고 커서 밤이면 큰 고목나무에서 귀신 우는 소리가 들리고 어떤 날은 콩 볶는 소리도 들렸고 솥뚜껑이 솥 안으로 들어가는 변고도 있고 하여

도깨비장난이라고 하셨습니다. 집안 고목에서 까마귀가 운다고 큰외숙이 육혈포를 가지고 나오다가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셨는데 그 때오발로 총이 엄지 발라각을다치셔서 평생을 다리를 저셨습니다.  운니동 집은 집터가 너무 세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우환이 끊이지 않아 무서우셨다고 저의 어머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일류 독선생으로 개인지도

유정은 어렸을 적부터 한학과 붓글씨 하모니카. 바이얼린을 배웠다고 합니다. 큰외삼촌은 유정에게 서울의 일류선생을 맞아 개인지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큰 외삼촌은 무엇이든지 최고 일류를 선호하셨고 누이들에게도 각각 독선생을 두고 붓글씨와 그림을 익히시게 하셨고 당신도 거문고도 사사 받으신분입니다. 한 예로 전라도에서 한지를 마차로 사다가 홍두깨를 올려 다듬이를 한 후 사용했다고 전합니다.

외삼촌 유정은 192012살에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9213학년으로 월반을. 한학 덕분에 공부를 잘했다고 합니다.

 김유정은 휘문고보 5학년때 키가 5.67척이라고 기재 되어 있습니다키가 훤칠하게 크시고 인물이 훤했다합니다.


일본 서장과 옷 바꿔 입고 독립만세

큰외삼촌은 부인이 셋, 첫째분에게 영수 진수 딸이 있고 둘째분은 딸이 있었는데 어렸을적 사망. 셋째 분은 기생 20여명 중에서 뽑으신분이라고 하는데 키가 작으마 하시고 얌전하분이셨습니다. 아저씨가 가장 사랑하신분입니다. 우리는 큰외숙모는 보지 못했고 이 셋째부인이 무슨 때만 되면 우리 집에 오셔서 옛 얘기를 들려 주셔서 외가에 일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습니다.

 

도깨비 나온다는 운니동 집을 팔고 집을 줄여 관철동으로 이사를 합니다. 또 숭인으로 이사를 합니다

숭인동 집은 동편에 손병희 댁 상춘원, 남서쪽에 박영호 북쪽은 과수원이 있다고 전합니다.

큰 외삼촌이 일본 서장과 친지들 18명이 사냥을 갔는데 큰외삼촌이 일본 서장의 옷을 바꿔 입고 독립만세를 불러 18명 모두 감옥에 갇혀 외가에서 옥바라지를 오랫동안했다고 꼬마 외숙모는 말합니다. 매일 그들이 감옥에서 나올 때 까지 백숙 같은 고급음식을 차입했는데 그때 재산이 많이 축 났다고 합니다.

 

큰외삼촌 김유근

후일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방랑 생활을 하실 때 큰 외숙이 일 년에 몇 번씩 저의 집에 오십니다. 큰외삼촌은 다리를 저십니다. 운니동 집에서 까마귀가 재수없게 운다고 육혈포를 들고 나가시다가 문지방에 걸려 넘어져서 총오발로 엄지발가락을 다치셨습니다. 그분이 남루한 차림으로 바랑이 등짐 하나 메고 절뚝이며 전국을 떠돌며 유랑 생활을 하셔도 그 분의 표정은 당당 하고 밝으셨습니다.

유정이 연희 전문학교 문과 입학 후 집안이 춘천 고향으로 낙향 하면서 유정은 봉익동 서삼촌 김정식 댁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가세가 기울어지는 것에 대하여 큰외삼촌의 낭비벽과 주색잡기 난봉으로 아는데 사실은 독립만세사건의 뒷돈과 또 가장 큰 것은 미두라고 합니다.

유정의 조부 김익찬께서는 사마좌익금부도사를 지내신분이고 을미년 1895년 민비 시해사건 이후 춘천 의병 5천명의 재정을 지원 하신 가문의 장이셨다합니다.

유정의 작은 아버지 (삼촌)은 연대 외과 의사인데 성격이 까다로셨다 합니다. 의처증으로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시기도 했다고 합니다. 유정이 삼촌댁의 기거를 할 때 춘천에서 큰 외삼촌이 제때에 식비도 못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돈 마련은 곡식을 팔던지 땅을 팔아야 했다고 꼬마 외숙모는 그 때의 사정을 말합니다. 삼촌댁에서는 재촉을 하고 유정은 삼촌댁께 몹시 미안해 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장조카인 김유근을 금치산까지 하니 더욱 사이가 멀어졌다고 합니다. 옛날 유정의 조부가 차남 김정식을 친구분의 따님과 혼약을 맺어주었는데 두 분이 모두 세상을 떠서 큰외삼촌 유근이 전라도에서 수소문하여 그 처자를 찾아 삼촌을 혼례 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그때 신부는 머리빗하나 허리춤에 품고 왔다고 합니다. 거기에 신부는 다리도 불편한분이셨습니다.

큰외삼촌 유근은 외할아버지 김춘식가 동생에게 떼어 주라는 재산보다 200석을 더 떼어주고 봉익동 집과 살림일체 화초장까지 사서 살림을 내주셨다고 꼬마외숙모가 전합니다.

 

사랑

봉익동 삼촌댁에서 유정이 얹혀사는 것은 비참에 연속이었습니다. 밤 늦게 들어가면 대문 빗장이 잠겨 있어 문밖에서 밤을 지새울 때가 허다 했다고전합니다. 봉익동 유정의 삼촌 김정식씨는 저녁에 늦으면 대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명령을 하셨다합니다.

이때 기생 박녹주를 짝사랑하던 때라 박녹주가 저녁에 나가 소리를 하고 밤늦게 돌아오는 일을 하니 기생의 뒤를 따라다니는 유정이 집에 일찍 돌아올 수 없었겠지요.

그 당시 장안에 기생과 대학생의 연애 사건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박녹주는 연회장이나 영월관에 나가 남도 창을 하며 전라도 재벌 김경중(김성수씨의 부친)의 첩살이 하는 기생이었다고 합니다.

유정은 춘천집에 양면괴지 한 장에 한자를 커닿게 적은 편지 20을 보낸적이 있는데 무슨 큰일이 일어났나하고 급히 돈을 마련하고 보냅답니다.

큰외삼촌이 돈을 마련하여 보내면 유정은 박녹주에게 줄 선물을 사고 기생이 만나주지 않으면 절망 때문에 술 한 잔이 나중에는 폭주를 했다고 합니다. 박녹주의 남동생에게도 누님과 연결 해달라고 돈을 주고 뜯겼다고 합니다. 유정은 연상의 녹주에게 처음은 선생에게”, 나중에는 협박까지 하며 혈서를 썼다고 합니다.

저의 남편이 어느 연회장에서 박녹주를 만났을 때 김유정이 처외삼촌이라 하니 그렇게 유명해 질 사람인줄 알았으면 잘해줄걸 좀 더 잘 해줄 것을했다고 합니다.

유정의 짝사랑은 길게 가지 않고 1년이 지나 끝났습니다.

유정은 온 몸으로 아프게 짝사랑으로 끝냈습니다.

사랑은 유동체

어머니 사랑을 그리워했고 기생을 짝사랑했고 신여성을 사랑 했고 학교 선생을 사랑했고 동경여대생을 사랑했고 그의 사랑은 짝사랑으로 모두 끝납니다. 유정이 내 어머님께 여러 번 부탁하신 여인은 유학생, 사돈간이라 사돈간은 혼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이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에서는 어떻게 하던지 결혼을 시키려고 중매를 서고 돈을 마련하여 주면 사흘이 멀다하고 돈을 다 없앴다고 합니다. 저의 어머님도 학교 여선생과 선을 보이신 적이 있다고 하십니다. 결혼 예물로 채단도 준비하고 금반지도 준비했는데 그것도 가지고 나가 행방이 모연,

흑석동 이모님과 동작동 이모님이 총각 딱지는 떼야한다고 결혼을 시켰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것도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유정의 소설 중 소재는 산골

내어머님은 까끔 유정의 소설 중 반은 내가 소재를 제공 하셨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님이 시골로 시집 오셔서 농촌 생활 하는 누님의 어려운 삶을 읽어갔겠지요.

어머니는 광주구군 산골(山谷)으로 시집오셨습니다. 동네 이름이 산골(山谷)입니다. 어머니는 서울과의 생활이 많이 달랐습니다. 처음 유정이 누님을 뵈러 온 산골에서 새참을 이고 밭으로 나가시는 것을 보고 울고 갔다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친정 식구들이 모두 울었다고 합니다. 어머니와 유정은 유독 우애가 깊으셨다합니다. 어머니가 친정에서 유정의 옷 수발을 해주셨다고 합니다.

유정은 항상 한복을 애용하셨다합니다. 흰 두루마기를 제일 좋아하셨는데 가끔은 검은 두루마기도 입으셨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누님이 결혼하여 시골로 떠났으니 유정은 누님이 그리웠겠지요. 그래 자주 산골로 누님을 뵈로 왔다고 합니다.

 

저의 어머님도 문맥이 곱고 문중 여문장가라고 불리십니다. 몰락해가는 친정집안 일이 소설보다 더 파란 많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써야지. ...써야지 하시면서 정작 한 줄도 쓰지 못하시고 많은 아픔을 가슴에 담고 돌아가셨습니다.

 

저의 고향 이름이 산골입니다.

저의 어렸을 적 머슴이 땔감으로 진달래. . 노란 동백꽃이 섞여 한짐 지고옵니다.

김유정의 동백꽃 산골나그네를 읽고 이곳 산골에서 쓰셨다 생각 했습니다. 노란 동백꽃이 요즈음은 생강나무라고 불립니다. 김유정의 동백꽃 표지그림 중 붉은 동백꽃을 그린 책도 있었습니다. 시골의 정경은 어디나 비슷하지요.

마을 입구에 술집이 있고 개울가에는 물레방아간이 있고 산에는 진달래 동백꽃이 피고 봄에는 노란 송화 가루가 날아 물에 뜹니다. 지나는 떠돌이나 걸뱅이들이 즐겨 몸을 쉬고 가는 물래방아간이 있습니다 인심도 순박합니다. 초겨울이 오면 얼개미와 채반 똬리 같은 풍속 품을 팔러오는 전라도 아낙이 옵니다. 우리 집에도 안잠쟁이가 왔다가 논번기 봄이오면 돌아갑니다.

 

외삼촌이 신춘 문예 당선금을 탄후 선물을 한아름 사서 저의 어머니를 찾아오셨다고 저의 큰 언니가 전합니다. 이종사촌의 말을 빌면 시골에서 고생하는 저의 어머니를 위해 쓰신 작품이라 합니다. 그 당선금을 타시고 누님께 달려 오신겁니다.

누님께는 담홍색의 본견 저고리 감과 매형께는 만년필, 조카에게는 가방 ,조카딸에게는 검은 벨벳 원피스,

후일 나는 어머니가 서울 가시면 그 담홍색 저고리를 부등켜 안고 울던 생각이 납니다.

유정 외삼촌은 조카딸(옥근)의 손을 잡고 숲이 울창한 소따배기를 산책했다고 옥근 언니는 기억 하고 있습니다. 어린 조카딸에게 네 신랑감은 내가 구해주마 하셨다고 합니다. 언니는 그 때 여섯 살 때라고 기억 합니다.

 

유정 외삼촌이 산골에 오시면 별채에 묵으셨다 합니다. 별채는 저의 부모님이 동생을 위한 작업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유정은 하모니카와 바이올린을 잘 켜섰다고 합니다. 산곡에 오시면 사랑채 마당에 멍석을 깔고 바이얼린과 하모니카를 동네사람들에게 들려주셨다고 저의 큰오라버니(좌근)께서 전합니다. 학창시절 하모니카 YGK(김유정의 약자)밴드를 조직하여 방송국에 나가 하모니카 독주도 했다니 놀라운 솜씨이지요 .또 바이얼린도 방송국에 나가 연주할 정도로 잘 켜섰다고합니다.

 

병이 깊어 광주군 산골로 오다.

유정 아저씨가 병이 깊어 저의 아버지께서 서울 정릉에 계신 유정을 등에 업어서 전차에 태우고 또 차를 대전하여 저의 집으로 모셔왔다고 합니다. 그때 전차를 세워 삼촌을 위한 담배 여러 갑을 사셨다고 합니다. 유정이 담배를 좋아하니 산골가서 피라는 매형의 배려셨겟조. 두 분은 처남매부 관계시며 재동공립 보통학교 동문이십니다.

저의 부모님은 시골에서 몸보신 시킬 생각으로 산골로 모셨다고 합니다. 후일 유정아저씨 시중을 들기 위해서 조카딸 진수(큰외삼촌 유근의 딸)을 데려 왔다합니다. 조카딸 진수가 시중 들러 산골에 온 후 보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유정이 이상에게 보낸 편지에서 닭을 몇 마리 고아 먹으면 ....구렁이를 몇 마리 고아 먹으면 내 병이 나을 거라고 편지 글이 있습니다. 내 어렸을 적 우리집 바같 마당가 맞은편에는 뱀탕 구덕이 있던 기억이 납니다. 동네 사람들이 뱀을 잡으면 우리 집으로 가지고 와서 유정은 오래전부터 뱀을 약으로 과먹었습니다.

유정의 병은 점점 악화 되어 폐결핵으로 객혈을 하고 치루가 심해서 터지면 출혈. 고통을 호소 했다고 어멈님니이 말씀하셨습니다.

유정이 폐결핵으로 고생 했지만 정작 치류가 더 심하여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유정아저씨는 산골 요양 중에도 일본 유학 가고 싶은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병중에도 열심히 글을 쓰셨는데 글을 마치면 매형에게 신문사로 부쳐달라고 하셔서 저의 아버님이 자전거를 타시고 여러 번 신장에 가셔서 원고를 서울로 우송하셨다고 합니다.

병중에도 열심히 글을 쓰셨는데 돌아가신 후 그의 원고를 안희남이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저의 외가에서는 안희남을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가 유정의 사후 원고를 모두 가지고 가서 일부 안희남의 이름으로 발표한 작품중에 문체가 김유정의 작품 같다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안희남은 월북 작가입니다.

외삼촌이 돌아가실 때 저의 오빠 좌근은 소학교 5학년 우근오빠는 3학년을 강제로 서울로 보내시고 언니 둘은 안방에 가두어 두셨는데 큰언니 (옥근)가 창호 문을 찍고 관이 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큰외삼촌 (유근)과 저의 아버님이 유정의 시신을 서울로 모셔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을 하고 한강물에 재를 흘려보냈다고 하십니다

 

큰외삼촌은 내가 잘 했지” “그때 화장을 잘 했어 결혼을 시켰더라면 ...아마 더 살았을 까 몽당귀신을 면했을 까? 아시워 하시는 말씀일까 운명은 재천인 것을 .. 큰외삼촌은 조상묘 30여기 전체를 화장을 하셔서 그일대 연기가 한 달간  끊이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저의 고종사촌 언니가 전화를 했는데 춘천의 김유정 동상이 꼭 너의 아버지 같다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만 두 분이 비슷 하신점이 있나봅니다.

 

그는 3 년 동안 주옥같은 글을 30여 편 쓰셨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김유정에 관한 글이 교과서에 나와서 00교장선생님께 여줬더니

일류는 못 되고 삼류! 별 볼 일 없는 소설가다하셨고 또 저의 친동생이 독일에 있을 때 도서관에서 김유정 작품집 동백꽃 중 을 읽으니 큰외삼촌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야 부끄러워서 김유정이 외삼촌이라고 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소설과 실제 인물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픽션과 논픽션을...

작품 구성을 할 때 인물의 성격 설정을 어떻게 할까 고심합니다. 유정이 흑성동 3째 누님이나 다섯째 누님이신 저의 어머니의 대한 글이 없습니다. 동생 부흥이도 없습니다. 조카 영수도 없습니다. 밍충이 형수도 꼬마 맹추 형수도 있을 법한데 없습니다.


어떻게 귀공자로 자라 그가 해학적이고 비속어 토속적인 글을 쓰셨을까 궁금합니다. 아마도 그것은 보통인과 다른 인자가 있나생각해봅니다. 내 어머니를 비롯하여 외 가집 식구들은 서울 표준어를 쓰셨고 고운 말을 하셨습니다.

천재적인 문학성이 내재해 있었나봅니다. 이제는 제가 김유정의 문학을 이해합니다.

일찍 요절한 외삼촌에게 약병아리라도 고아 드렸으면 하고 마음 아파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약병아리가 저의 숙제였는데 이제는 김영기 선생님 덕분에문제가 해결됐습니다.

춘천의 김영기 선생님이 김유정의 문집, 문학상. 동상을 만들어 기념하고 있습니다. 김영기 선생님이 김유정의 전집을 만드실 때 1965년경 저에게 원고 정리를 도와달라고 하신 기억이 납니다. 또 소양강변의 김유정기념비는 우리니라 최초의 문인비입니다. 의암댐 근처에 나는 광주로 간다.”고 쓰신 글귀가 60년대 중반에도 큰 길 가에서 보였습니다. 아직도 그 글귀가 살아있는지 궁금합니다.

 

지금은 김유정문학촌을 전상국촌장님이 운영하고 계십니다. 김유정 사업기념사업회 전상국회장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김유정역이 생기고 김유정우체국도, 김유정길도 생겼습니다.

 

지금은 김유정이 저의 외삼촌이라는 것이 영광스럽습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영원한 우리의 문인 유정은 큰 별이 십니다.


김유정 79회 추모기념일

2016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