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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

김유정의 형제 자매들


김유정의 형제 자매들

김유정의 아버지 청풍 김씨 김춘식과 어머니 청송 심씨는 8남매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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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녀 중 김유정은 아들로는 막내고 맨 위로 형 김유근이 있다.
누님들이 5명 아래로 여동생 부흥이 있다

김유정의 형

김유근은 김유정의 큰 형님이시다.
김유정
은 저의 작은 외삼촌이 되시고 형 김유근은 제게는 큰외삼촌이 된다
제게 큰 외삼촌은 기억이 생생한 멋진 기인이 셨다
김유정의 소설 속에 나오는 "형" 처럼 퇴폐적이고 방탕한 난봉꾼 속인이 아니다.
소설 속에 내가 주인공이면 자서전이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별도로 큰 외삼촌의 이야기를 따로 적겠다.

김유정의 누님들

첫째 누님은 박씨댁 박찬영 부사한테 시집을 갔는데 김치에 깨소금은 넣어서 일찍 소박 맞았고 자손 없이 일찍 돌아가셨다

둘째 누님은 얌전한데 시집을 가서 아이를 못 낳아서 소박을 맞았다고 한다
일찍부터 돈을 모아 학교를 세우겠다는 것이 포부였다 .조혼에 실패 하신 후 둘째 누님 동직이 누님은 셋째 누님 댁 근처 동작동에 살아서 <동직이 누님>이란 칭호가 붙었다.
유정이 필동에서 이 둘째 누님 댁에 머물렀는데 피복공장에도 다니며 자립생활을 했다.
뒤에 정씨라는 분과 재혼을 했고 이분이 광산을 했다고 전한다
그 후 유정이 광산에 내려가 약 6개월간 일 (감독)을 했는데 금 노다지 금 따는 콩밭의 소재가 된다.
광산에 나쁜 공기 때문에 유정이 폐결핵을 얻었다고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흑석동 셋째 누님이 떡 장사하라고 밑천을 대주면 사흘 만에 밑천을 다 없앴다고 한다. 그 원인은 장사도 할 줄 몰랐지만 셋째 누님 댁에 조카들을 무척 사랑하여 둘을 데리고 가서 팔다 남으면 떡을 조카 아이들을 주시어 조카들이 먹성이 좋아 다 먹었다고 전한다. 돌아가실 때 둘째 누님 댁 조카의 꿈에 하얀 소복을 입은 동직이 이모님을 뵈었는데 그날 돌아가셨다고 한다.

 셋째 누님은 김유경이신데 유자가 들어가면 좋지 않다고 해서 유자를 빼고 김경이 라고 했다고 사촌 동생이 들려 주었다. 셋째 누님은 키도 훤칠하니 크시고 성격이 활발 하시고 성격이 강한분이다.
한문 일어도 잘하시고 암기력이 대단한 분이시라 영어 사전을 술술 외우시는 분이셨다.
친정에서 독선생을 두고 공부를 하면 후다닥 해치우고 나무 위에 올라가서 밖을 내다 보거나 남자들 하는 놀이 같은 것을 즐기셨다고 한다.
결혼하여 딸을 하나 시댁에 두고 집을 나왔는데 오라버니(김유근)이가 하도 무서워 친정에는 오지 못하고 대문 밖에서 서성이다 가곤 했다
2 2녀를 두시고 흑석동에서 사시었는데 그 근처에 땅이 많아 부자 소리를 듣고 사셨다. 집 근처에 호박 밭이 많아 지금도 기억을 한다. 이모부님은 키가 헌칠하게 크시고 체격이 좋으시고 이국적 풍모를 지니신 분이 셨는데 왕가의 높은 벼슬을 하신 무인이셨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경호대장이 아니실가 짐작 해본다. 제가 중학교 때 흑석동 이모님댁 대청에서 사진을 보았는데 임금 뒤에 칼 차고 제복입고 서계신분이 이모부님이셨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흑석동 이모님이 설빔을 꾸려 산골로 내려 보내주신 기억이난다. 저의 어머님 일손이 딸린다고 바느질을 해서까지 보내신 자상한 분이다. 외가댁 외삼촌과 어머니형제들은 우애가 깊으셨다.
흑석동 이모님은 8남매 중 제일 오래 喜壽까지 장수 하신 분이다. 성정이 곧으시어 아이들에게 호랑이 할머니라고 불리신분이기도하다. 따님 시집 보낼 때 몸종으로 딸려 보낼려고 여아를 아기 때부터 키우셨는데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켜 시집을 잘 보내주시고 잘 살고 있다.이 아이는 성격이 착하여 지금은 따님과 형제처럼 잘지낸다

  넷째 누님은 양가 친가 외가가 쌍재상인 오승지댁으로 출가 하셨다한집안에 승지가 다섯 분이 나와서 오승지 댁이라고 불린 정승댁이다.
그 집에서 다섯째 누님인 저의 어머니를 원했는데 역혼은 못한다며 순서대로 결혼을 시켰다고 꼬마 외숙모가 들려 주셨다 .
시모님 되시는 분이 300석을 시집 올 때 친정에서 가지고 오셨는데 너도 친정에서 300석을 가지고 오라고 하시며 시집살이를 시켰다고한다.
결혼 예물이 하도 많아 한나절이나 두루마리를 읽었다고 전한다.
친정에서도 혼수를 무척 많이 해가지고 갔다 한다. 그래도 친정에서 땅 마지기를 떼오라고 친정으로 보내곤 했는데 얌전한 넷째 누님은 무서운 오라버니에게 말은 못하고 속으로 병이 들어 갔다 한다.
시모님의 시집살이는 무척이나 심해서 곡간 열쇠를 며느리에게 맡기고 몰래 아래 것 들에게 감추게 하여 아침밥을 못 짓게 심술을 부렸다고 한다. 급히 친정으로 쌀을 보내달라고 사람을 보내기도 하고 또 여자의 그것 월경대를 시녀에게 몰래 가져다가 빨아 사람이 다니는 곳에 널어 민망을 주기도 하며 괴롭혔다고 한다. 그 당시 양가에서는 여자의 그것을 친정에서 빨아다 주는 것이라고 한다.
병들어 친정으로 왔는데 몸이 붓고 식사를 잘하지 않고 좀 이상했다. 반찬도 종지에만 담고 젓갈 종류도 많이 10가지를 놓으라고 투정을 부렸는데 큰 외삼촌 (유근)이 불쌍하다고 마당에서 업고 다니셨다고 한다.
병들어 자리잡고 누어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때 시집에 연락하여 고쟁이를 보내 달라고 했는데 시집에서는 묵묵 무답이었다고 한다.
한 예로 숙고사 고쟁이를 색색으로 죽죽 많이 해 가서 고쟁이로 대소변 처리를 할려고 했는데 입어보지도 못하고 새색시가 죽었다. 결혼은 가문과 가문이 하는 것인데 재산도 필요했다고 본다. 돌아갔을 때도 신랑은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고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다섯째 누님은 내 어머니시며 아명이 흥선이시고 본명은 복달이다.
나의 부모님은 유정의 형님 유근의 의형제 유원준 당숙이 사촌 동생 유세준을 소개로 결혼을 했다. 당숙은 큰 외삼촌이 일본 유학을 보내드린 분이다.
나의 아범님은 차남이라 외가에서 결혼 후 재산관리를 시키고 싶어 하셨다 한다. 저의 아버님은 유정과 재동공립보통학교 동문이시고 처남매부 사이시며 친구신데 저의 어머님의 처녀 때 식당으로 들어가시는 뒷모습에 당기 꼬리만 보셨다고 한다. 부친은 중앙고등보통학교를 다니셨다.
두 분의 결혼 날 외가에 앞 마당에 석류 나무의 석류가 주렁주렁 열려 보기 좋으셨다고 한다

.덕분에 우리 집도 가을이면 석류가 주렁 주렁 열리었다. 저의 아버님이  앞 밭에 유난히 석류를 많이 심으시어 가을이면 석류가 빨갛게 익어 보기 좋았다. 석류로 두 분의 사랑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계셨다.
유정이 누님을 보러 산곡에 왔을 때 저의 어어님이 밭으로 참을 이고 가셨는데 그 광경을 보고 유정이 울고 돌아 갔다고 한다.
 
유정은 저의 어머니 바로 아래동생이며 두 분의 우애가 무척 깊으셨다고 한다.
저의 부모님이 별채에 유정의 방을 꾸려주시어 산골에 오시면 거기서 묵으시고 글을 썼다고 한다.
외삼촌 유정은 하모니카와 바이올린을 잘 켜시어 산골에 오시면 마당에 멍석을 깔아 놓고 동네 분들을 모아  연주를 했다. 마당 가에 아름다리 큰 대추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여기서 대추를 3가마니 정도 많이 땄다. 연주하는 날은 밤을 가마솥에 서너말 삶아서 놋대접으로 하나씩 구경군에게 주셨다고 한다.

 외가 명문가가 추락으로  저의 어머니는 늘  민망해 하셨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서울 아씨>로 대접을 받으셨고 문맹퇴치로 아녀자에게 글도 가르치고  의료 위생에도 관심을 기우리셨다.
장도 많이 담으시어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동수매기 사람들은 내 어머니 밥을 안 먹어본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인심이 후하셨다.
어머니가 궁핍해 지자 친척들은 손이 커서 남에게 퍼주어 망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내어머니는 예술 감각이 뛰어 나고 남에게 후하셨다.

 
어머니는 유정의 소설중  시골 얘기의 소재를 내가  제공 하셨다고도 했다.

내 고향의 이름이 산골인데<산골 나그네>라든가 <동백꽃> 같은 것은 산꼴 마을에 흔히 있는 소재다.

막내 외삼촌 김유정이 저의 집 산골에서 1937년 3월 29 폐결핵과 치류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유해는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을 해서 한강 흐르는 물에 뿌렸다고 큰외삼촌과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화장을 한 후에 문인들이  왔다고 한다. 유정이 묵었던 별채는 돌아가신 후 헐리고 거기에 복숭아나무를 심어 복숭아를 따 먹은 기억이 난다. 앞쪽은  화단으로 가꾸어 연지빛 목단이 탐스럽게 피고 짙은 향을 풍겼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 한다.

다섯째 누님 김복달은 광주 산곡으로 저의 부친 유세준씨와 결혼을 하셨다. 4 3녀를 두셨고 장남은 좌근 차남은 우근 6.25때 전사하고 장녀는 옥근 차녀는 청근 저는 3녀 필근이다. 3남 인근이 아직도 고향 산곡에서 도예를 하고 있고 4남 광근이는 공인 중계사.

장남 오라버니는 기계를 전공 하신 분인데 예술분야에 관심이 많다.
방학 때 일본 친구와 산꼴에 내려오면 마작을 두는데 저도 오빠 옆에서 앉아 함께 마작을 두었다. 마작은 셋이라야하는데 짝이 모자라 어린 내가 대작을 했다. 오빠 덕분에 6살 때 마작을 배웠다. 이 오빠는 외탁을 했다고들 말한다. 특히 유산을 간직하지 못하고 다 팔아 없앴기 때문에 낭비벽이 큰외삼촌을 닮았다는 표현이다.
장남 오라버니는 기계를 전공 하신 분인데 예술분야에 관심이 많다..
큰 오라버니는 문학 예술분야에  관심이 많다.
학생때 큰 소리로 일본 소설을 읽고 무덤이 있는 동산 잔디 위에서 연극까지 하며 연출도 했다. 항상 새로운 것에 마음이 쏠리시어 해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도전 정신이 왕성분이다.

작은 오라버니 우근은 음악을 좋아하고 만도링을 잘 다루었다. 6.25사변때 옹진 전투에서 20세의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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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인근은 도예가로 활동하며 하남시 도예회장직을 맡고 있다.
시 서화 음악까지 만능 예인이다. 거기에 부지런하여 혼자서 남들의 세목을 한다.
욕심이 커서 대작을 좋아한다. 대형호를 좋아하고 옛 진사 철 청아 같은 전통을 좋아하는데 나와는 잘 다툰다. 현대와 조화를 시켰으면 하는 것이 내마음이다. 트럼벧을 잘 불러 내가 산골에 가면 들려주며 감상하라고 한다.
하루에 한두시간은  트럼벧부는데 시간을 보내는  음악 애호가다.

4남 막내는 광근는 공인중계사로 활동중이다. 광근이는 시도 잘 쓰고 붓글씨 초서를 잘 쓰는데 술이 한잔 들어가면 더 잘한다고 하는데 알코올 중독이 될까 걱정을 한다. 평소에는 말이 없고 초서 연습도 하지 않는데 술이 들어가면 붓글씨를 쓰고 말이 많아지는데 주량은 소주 반병 정도며 딸 유나가 있다.

나는 형제  열로는 다섯째, 딸로는 셋째 딸. 나는 수필가이며 화가다.
문협회원이고 미협회원이다. 84년 수필집을 냈고 개인전 18회 회원전은 200여회 출품했다

2008년은 우정의 향기전초대개인전, 청계갤러리 초대 개인전,종로미협회원전,7월 말에 골든아이아트페어 부스전 출품 예정이며 9월1-18일까지 양천도서관 갤러리에서 초대개인전을 할 예정이다. 금년 같이 초대개인전을 많이 해보기는 처음이다.
새로운 작품응 구상하며  나도 도전 정신이 강하다.


저의 부친이 해방 되던 해 장질부사로 돌아가시어 저의 큰 오라버니가 시골 전답을 마을 사람에게 외상으로 팔고 검은다리 아버지가 태어나신 집으로 이사를 했다 .땅을 팔면 인프레가 되여서 땅 한마지기 값이 현재 쌀 세섬 값이면 삼년 후에 잔금을 받을 때에는 쌀 한말 정도 밖에 못 살 정도로 인프레가 컸다. 동수매기 경목씨 부인이 걸어가도 아씨네 땅. 처다 보아도 아씨네 땅이었는데 하며 땅은 파는 것이 아닌데 하는 분도 있다. 이제는 남에 것으로 뒤 바꿨었다. 땅은 본래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돌고 돌아가는 것인데
내 어머니의 생활이 궁핍해 지었다.
김복달님이  새벽기도를 가시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시어 59세 때 뇌진탕으로 사망.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 흑석동 이모님 생신 날이었다. 집에는 꼬마 외숙모님이 흑석동 이모님 생신에 함께 가자고 오셔서 빈집에 기다리고 계셨다. 어머님의 소식이 없자 꼬마 외숙모는 혼자 이모님 생신에 가셨다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 말을 되풀이 하곤하셨다.

유정이 누님을 보러 산곡에 왔을 때 저의 어어님이 밭으로 참을 이고 가셨는데 그 광경을 보고 유정이 울고 돌아 갔다고 한다. 유정은 저의 어머니 바로 아래동생이며 두 분의 우애가 무척 깊으셨다고 한다.
저의 부모님이 별채에 유정의 방을 꾸려주시어 산골에 오시면 거기서 묵으시고 글을 썼다고 한다.
외삼촌 유정은 하모니카와 바이올린을 잘 켜시어 산골에 오시면 마당에 멍석을 깔아 놓고 동네 분들을 모아  연주를 했다. 마당 가에 아름다리 큰 대추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여기서 대추를 3가마니 정도 많이 땄다. 연주하는 날은 밤을 가마솥에 서너말 삶아서 놋대접으로 하나씩 구경군에게 주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유정의 소설중  시골 얘기의 소재를 제공 하셨다.
내 고향의 이름이 산골인데<산골 나그네>라든가 <동백꽃> 같은 것은 산꼴 마을에 흔히 있는 소재다.

막내 외삼촌 김유정이 저의 집 산골에서 1937년 3월 29 폐결핵과 치류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유해는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을 해서 한강 흐르는 물에 뿌렸다고 큰외삼촌과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화장을 한 후에 문인들이  왔다고 한다. 유정이 묵었던 별채는 돌아가신 후 헐리고 거기에 복숭아나무를 심어 복숭아를 따 먹었다. 별채가 있던 자리인지는 알았지만 유정삼촌이 돌아가신 곳인지는 후에 알았다.
화단으로 가꾸어 연지빛 목단이 탐스럽게 피고 짙은 향을 풍겼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 한다.


김유정 외삼촌은 1907년 1월 11 서울 운니동에서 태어나셨다. 외할머니께서는 젖이 부족하시어 유모를 두셨다. 인물이 준수하고 말이 없고 그런데 말을 할려고 입을 열면 첫마디를 힘들게 하셨다고 한다.
어렸을 적에 유정이 단명할 것이라고 해서 아명을 멱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유정은 7살 때 어머니를 잃고 9살 때 아버지마저 잃고 외롭게 지냈다. 어렸을 적 부터 한학과 붓글씨를 배우고 우미관에 가서 영화도 보고 12살에 재동 공립보통학교에 입학을 했다. 하모니카 바이올린도 배우고 공부도 잘했고 연주도 잘하여 실력을 쌓았다 갔다.. 큰 외삼촌 김유근은 무었이던지 최고로 유정의 선생을 마련해 주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5학년 때 집안이 춘성으로 가서 봉익동 삼촌댁에 얹혀 살게 되어 결석도 많고 성적도 떨어져있었다. 휘문고등보통학교 4학년 때 결석 89회 졸업 할 때는 뒤에서 11등 그래도 연희대학 문과에 입학했다. 가세가 기울어 돈 없고 병들고 어떻게 불우한 나날인데 글을 썼는지 의심스럽다.

 유정의 막내 동생 부흥은 숙명여고를 다니었는데 미인이었다.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고 신문에도 기사가 실리는 재원인데 집안이 어수선할 때 집으로 편지가 날아오고 남학생들이 따라다니고 하여 큰 외삼촌이 꾸중을 하셨는데 그 때부터 말없는 자페증에 걸린 것 같다고 한다. 그 후에 수녀원에 갔다고 전한다
생사를 모른다

<다음은 큰 외삼촌 김유근의 관한 얘기를 쓸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