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름다운 삶

유정의 집안이 춘성군 실레 마을에서 살게 된 동기

 유정의 집안이 춘성군 실레 마을에서 살게 된 동기

숙종의 외조부 영돈령부사를 지낸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세상을 떠났을 때 묘를 춘천군 남면 안보리에 사용하고 부터다. 청풍부원군 김우명은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나라의 제도를 개혁하려했던 김유(金 堉)의 아들이다.
김우명의 셋째 아들 김석연(金錫衍)이 판서를 지냈고 그의 넷째 손자 김도택(金道澤)은 통천군수를 지냈고 도택의 아들 김성규(金聖規)가 삼척도호부사를 지냈고 성규의 아들 정묵(金正默) 이조참판으로 중직되었다. 정묵은 아들 4형제를 두었는데 넷째 아들이 김기순이다. 이 김기순이 김유정의 고조시다
김기순(金基恂1799-1835)은 김유정의 고조신데 춘천지방 실레마을로 낙향하여 터전을 잡았다. 장남 김병선(金秉善) 차남 김정선(金鼎善) 두 아들을 두었다.
김병선(1818-1878)이  김유정의 고조 할아버지시다. 이분이 재산을 많이 불렸다한다. 나랏님이 하사한 땅도 많았다한다.
김병선의 아들 김익찬(金益贊 1845-1909) 유정의 할아버지시다.
할아버지 김익찬은 사마좌임급부도사 (司馬莝任禁府都事)를 지내신분이다. 김익찬의 장남이  김춘식(金春植873-1917)이고 음직으로 사마좌임군부주사(司馬莝任軍部主事)로 제수받으셨다. 김춘식은 아들 형제 김유근과 동생 유정을 두었다.
김유정의 가문은 의병봉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춘천지방의 의병인맥은 화서학파(華西學派)로부터 양성되었다.
양평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로부터 중암(重庵 )김평묵(金平默)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 의암(義庵) 유인석(柳麟錫)로 학통을 있는 화서학파는 척사위정(斥邪衞正)의 유학파(儒學派)를 형성했다.
 을미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은 이 화서학파에서 나왔고 김평묵(金平默)은 1853년 가솔을 이끌고 춘천군에 자리를 잡는데 이 김평묵을 초청한 사람이 김병선이다.
김병선은 유정의 고조 할아버지시다. 마을 학동과 김익찬(유정의 조부)의 훈학을 맡게
했으며 재정을 지원한다.
1894년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을 빌미로 일본군은 서울에 주둔하게 된다. 1995년 민비를 시해하고 불태우는 만행을 자행한다.
춘천지방에서 오천명의 춘천의병이 모집 되는데 청풍 김씨 가문 김익찬에게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1907년 고종황제은 강제로 퇴위 당하고 일본제국이 조선을 장악 할 무렵 전국적으로 의병의 봉기가 일어난다. 이 때 춘천지방의 선비들이 김평묵을 찾게 되고 김평묵의 유학사상은 춘천지방에 영향을 끼쳐 척사위정의 실천강령을 세웠다. 국적토벌(國賊討伐)국모보수(國母報讐) 배양척왜(排洋斥倭)의 뜻을 내걸고 서울로 진격하는데 후방기지가 되었다.
당시에 김유정의 조부(김익찬)와 부친 김춘식은 재정을 담당했다고 한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탄의 비극적 상태가 발생하여 나라를 잃게 된다. 일본의 식민지주의 가혹 행위가 자행하면서 의병부대를 돕는 자에게 처벌하겠다는 위험이 다가오고 토지 조사를 실시하며 토지 수탈에 나섰다. 가솔이 서울로 이사를 하고 양쪽 살림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