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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들/유명인

허난설헌의 세가지 불만

허난설헌은 생전에 세가지 불만을 말했다는 군요
첫째는 여인으로로 태여난 것을 후회하고

두번째로 조선에 태어난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것은 동시대를 살았던 여인내들의 공통된 이야기였을 것이다.

또 하나는 현재의 남편(김성립)과 인연이 된것이였다고 전한다.
김성립은 나라의 충성한 선비인데도 사대부가의 선비답게 꼬장하고 남존여비 사상이 골수에
박혀서 아녀자를 무시 했을 것 같다.



 허난설헌이 27세로 요절 했을 때에 허균이 쓴 시


옥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 평생 불행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가혹하게 벌주고 속히 빼앗아 가는가?


거문고는 멀리든 체 켜지도 못하고

좋은 음식이 있어도 맛보지 못하였네.

난설헌의 침실은 고독만이 넘치고

난초도 싹이 났지만 서리 맞아 꺾였네.


하늘로 돌아가 편히 쉬기를

뜬세상 한순간 왔던 것이 슬프기만 하다.

홀연히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니

한 세월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구나.


허난설헌이 조선 여인으로서 호를 남긴, 이례적 인물이 된 데에는 동생 허균의 노력이 절대적이었다.
난설헌이 요절하자 허균은 친정에 흩어져있던 누이의 시와 자신이 외우고 있던 시를 모아 ‘난설헌집’를 펴냈다.
이 때 여러 사람의 발문을 받았는데, 유성룡은 “이상하도다. 부인의 말이 아니다”라는 감탄을 남겼다.
명나라 사신 주지번에게도 발문을 받았는데 그녀의 시에 감탄한 주지번은 “‘유선사’ 등 여러 작품은 중국 시의 전성기였던 당나라 시인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라는 극찬과 함께 이를 중국에서 출간해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조선인 역관 허순과 중국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한 소녀는 이 시집을 보고 ‘난설헌을 사모한다’는 뜻의 경란(景蘭)으로 이름을 바꾸고 “내가 바로 난설헌이 다시 태어난 몸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심취했다.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고 나중에는 천주교 기도문을 가져올 정도로 정형화된 사고를 거부했던 허균이기에 ‘난설헌집’을 남기고 ‘홍길동전’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특출한 성격때문에 광해군 10년(1618)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말았다. 박제된 삶을 거부한 남매의 비극이자, 조선의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