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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어린 시절

추억의 편린38-1안잠자기 아낙네 38-1안잠자기 아낙네 추수가 끝난 늦은 가을에 아낙이 아기를 업고 집채처럼 큰 짐을 이고지고 마을로 들어선다. 여인은 대나무로 역은 광주리. 채반. 체. 얼개미. 키. 똬리.솔을 팔러 다닌다. 어머니는 필요한 것을 여인에게 사시고 묵어가라 사랑채 뒷방을 내주셨다. 여인은 머슴들의 빨래도 돕고 집안의 잡일을 하다가 한 달동안 머무르다가 돌아갔다. 나막신을 깍고 내가 초등학교 입학 할 때 신이 귀해서 서울에 사시는 고모님이 천으로 신발을 만들어 보내주셨다. 일제시대에 내가 다니던 산곡간이학교에 운동화가 배급으로 나왔지만 그것도 짝짝이가 왔다. 한 켜래 뿐 수효가 부족했다. 대개는 짚신을 신고 다녔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가끔씩 고무신을 사오셨다. 일제 전쟁 막바지에는 물자가 귀하여 고무신을 사기 어려워 졌다..
추억의 편린 43 어머니가 아픈 손으로 아버지의 수의를 지으셨다 43 어머니가 아픈 손으로 아버지의 수의를 지으셨다 1946년1월 1일 저녁 때 모든 것이 꽈 !꽝 얼어붙은 추운 동지섣달 겨울. 할아버지를 가마에 태워 급히 신장에 있는 백부 댁으로 모셔갔다.할머니는 안방에 있는 작은 유리창으로 밖을 연신 내다보시면서 “아이 구 -아이 구 ㅡ”하시며 흐느끼셨다. 집안이 떠들썩하고 바쁘게 돌아갔다. 어머니가 팔에 기부스를 하시고 아기를 안고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고 서울에서 돌아왔다. 모두 울었다. 눈물이 흘러 얼음 되어 차갑게 굳어갔다. 울음소리 까지 얼어 얼음처럼 굳어 날아갔다. 정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까? 믿기지 않는 현실이 현실 되어 가슴을 아리게 했다.아버지는 짐차를 타시고 장작짐칸에 동지섣달의 모진 바람을 맞으시며 어머니를 퇴원 시켜 데리러 서울로 가셨다. 조수..
추억의 편린 42디프테리아에 무너지고 42디프테리아에 무너지고 1946년1월 1일 둘째 할아버지 댁 위준 당숙이 서울에서 자전거를 타고 산골로 왔다.나와 언니는 학교에서 1월 1일 새해 경축 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노상에서 당숙을 만났다.당숙은 자전거 패달을 계속 밟으면서“느네 아버지 죽었다!”“아저씨-” 언니와 나는 당숙에게 소리 쳤다.귀를 의심했다.““정말이다. 느네 아버지 어제 죽었어!” 청청벼락이라는 말이 이 것이구나.당숙은 자전거를 몰고 급히 가벼렸다.아버지가 엄마와 아기를 데리러고 사흘 전에 서울 가셨는데 죽다니 당숙이 한말이 거짓말이기를 바랐다. 추억의 펀린 42
추억의 편린41 아기 이름을 광근이라 지셨다. 41 아기 이름을 광근이라 지셨다. 어머니가 손을 다치셔서 서울 병원에 입원하신지 한달이 지났다. 병원에 입원 한 후 어머니는 사내 아기를 낳으셨다. 내게 동생이 또 생겨 남동생이 둘이 되었다. 나는 어머니 손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다. 그 때 어머니가 피가 흐르는 손을 움켜쥐고 아버지를 찾으셨다. “ㅇㅇ 아버지! ㅇㅇ아버지!!” 어머니가 당황 하셔서 아버지를 부르셨다. 나는 그때의 어머니의 절망에 모습을 잊지 못한다. 수술이 잘 되었다고 해서 안심은 되나 어머니의 손이 궁금했다. 어머니는 검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많이 다치셨다.어머니 손이 예전 같은 모습일까? 바서진 뼈를 맞추고 피부의 신경을 잇는 어려운 수술을 하셨다 했다. 나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다.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고 아기도 보고 ..
추억의 편린 38새색씨 옷 구경 38새색씨 옷 구경 오빠의 결혼 때는 내 나이는 6살이었다. 꽃가마를 타고 온 신부가 예쁘다고 들 했다. 대청에서 신랑 신부가 시부모님께 폐백을 드리고 나면 새색씨가 눈을 감고 방안에 앉아 있다. 사람들은 신부구경을 하면서 신부의 혼수를 무엇을 해왔나 구경을 하고 간다. 노랑 저고리 다홍치마를 입고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신부는 집안이 넉넉지 못해서 혼수 옷을 못 해왔다. 겨우 갈아입을 옷 두벌뿐이었다.더우기 일제시대라 모두가 어려웠다.사람들은 수근 댔다.어머니는 큰 언니 시집가면 줄려고 짬짬이 장만 해 놓은 옷감을 며느리에게 주었다.추억의 편린 38 계속
추억의 편린 39당질 결혼식의 떡을 ... 39당질 결혼식의 떡을 ... 아버지의 사촌 아들의 결혼식 때 떡을 해오라고 갑자기 부탁을 해왔었다고 한다. 이 아버지의 사촌은 아버지를 어머니에게 중매를 하신분이다. 우리 오빠 결혼 할 때는 술로 부주를 했기 때문에 부모님도 술로 부주를 하시려고 준비를 했는데 큰댁 할머니께서 갑자기 떡을 해오라고 하셔서 어머니는 부랴부랴 떡을 만드시려고 떡쌀을 물에 담그셨다. 쌀이 불려서 떡쌀을 만들려면 6시간 이상 걸린다. 저녁때가 되어서 쌀을 일고 방앗간에서 쌀을 빻아야 하셨다. 이 때 어머니는 임신 9개월 만삭의 몸이셨다. 그래도 새 며느리에게만 맡길 수 없어 동네 아낙과 부전이가 방아를 밟고 어머니는 배가 불러 방아확을 맡으셨다. 만삭이 되셔서 몹시 힘들어 하셨다. 발 방아 짚는 것은 본래 4명이 밟아야 균형이..
추억의 편린 35 씀바귀는 외가가 양반이 라야 35 씀바귀는 외가가 양반이 라야 이모가 산골에 오셨다.이모는 씀바귀나물을 좋아하셨다.이른 봄 씀바귀 달래 냉이가 입맛을 돋운다.어머니는 씀바귀를 삶아 고추장에 초를 넣고 무치셨다. “씀바귀나물은 외가가 양반이라 먹는다.”왜 이런 말이 나왔을까? 외가가 양반이면 입안 미각 구조가 다른가? 쓴 것도 참고 먹는다는 말인가?나는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과수원 배나무 소독을 하는 날 이모님이 오셨다.소독약을 끓이는 무쇠 솥은 직경이 1m가 넘는다. 유황냄새가 온 집안에 퍼졌다. 이모님은 숨을 못 쉬겠다하시고 시골 생활에 어려움을 아시고 커다란 무쇠 솥을 한 번 더 쳐다보시고 가셨다.추억의 편린 계속 35
추억의 편린 부모님이 화롯가에 마주 앉아 돈을 세다. 34 부모님이 화롯가에 마주 앉아 돈을 세다내가 여섯 살 어느 겨울 날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화롯가에 마주 앉으셔서 돈을 세셨다.“너무 큰 소리로 세면 도둑이 와요” 아버지는 어머니를 나무라셨다.부모님이 결혼하신지 20여년이 지났다. 아버지는 돈을 잘 버셨다. 결혼하신 후 과수원도 잘되어 과일을 팔아 해마다 땅을 사시고 산도 사셨다. 동경주 샘재의 수리 시설이 잘 된 곳에 논도 사셨고 집도 사셨다. 가을이면 샘재에 가셔서 며칠 묵으시고 추수를 해서 팔아오셨다. 두 분이 화롯가에 앉아 돈을 세시는 것인데 어머니가 큰 소리로 돈을 세셨다고 나무라신 것이다. 아버지는 사업을 잘하셨다. 산판을 허가 내셔서 나무를 잘라서 장작으로 서울에 파시고 그 자리에 유실수를 심으셨다 .잣나무 호두나무 밤나무...동네 사람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