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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

김유정의 형 김유근

김유정의 형 김유근

큰 외삼촌 김유근
저에게는 두 분의 외삼촌이 계십니다.
큰 외삼촌은 김유근 아저씨고 막내 외삼촌은 소설가 김유정입니다.
큰 외삼촌은 내가 알기로는 기인이십니다
김유정의 소설에서 나오는 ‘형’은 유정의 형이 아닌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보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디까지나 소설은 소설입니다. 어느 정도의 모델이 필요하겠지요
김유정의 소설의 나오는 “형”을 소설로 보아 주시라고 거듭 부탁 드립니다.
제가 큰 외삼촌(김유근)을 본대로 들은 대로를 기록하여 알리고자 합니다.
큰 외삼촌은 일년에 서너번씩 우리 집 산골에 들리시곤 하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저의 오라버니가 동수매기의 집과 전답을 정리하시고 약 1KM 떨어진 거문다리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거문다리 집은 저의 아버님이 태어나신 집입니다.
동수맥이집과 거문다리 집에 여러 번 오셨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 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란 중에 저의 식구가 무사한가 궁금하여 보러 오셨는데 그 때에 외삼촌을 마지막 뵌 것이 되었습니다.
아저씨는 두르마기 바지 저고리 차림에 바랭이 짐을 어깨에 메시고 절룩이며 저의 집에 오셨습니다.
서울에 사실 때 마당 가에 큰 느티나무 위에서 까마귀가 울고 개도 따라 짖어 집안이 시끄러우니까 전날 밤 꿈이 불길 했다고 하시며 저 까마귀를 쫓아버리신다고 육혈포를 들고 나가시다가 불행하게도 중문 문지방에 걸리어 넘어지면서 총알이 당신의 엄지 발가락에 맞아 불구가 되셨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외삼촌의 다섯째 누이 동생이시고 아명은 흥선이시고 호적상의 이름은 김복달이 십니다. 주로 부모님 생신 때에 큰외삼촌 내외분과 흑석동 이모님이 함께 오셨습니다.
외숙모님을 우리 형제들이 꼬마 아주머니라고 불렀는데 꼬마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시고 그냥 아주머니라고 불러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 분이 아저씨의 애첩인데 키가 유난히 작아 부쳐진 별명이고 이 분을 아저씨가 기생 20명중에서 뽑아 집으로 들이셨다고 합니다.
이 꼬마 외숙모는 양반집 따님인데 가세가 기울어 친정을 살리기 위하여 기생이 되셨다고 합니다.
외삼촌에게 머리를 얹고 첩이 된 분입니다. 친정 조카들을 모두 공부 시켰는데 경기여고를 나온 조카도 있다고 합니다. 조금도 화류계 티가 나지 않고 예의 바르고 얌전하시고 조용한 분이셨습니다. 시누이들이 별명을 “맹추” 또는 “꼬마”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외삼촌은 한집에 부인 셋을 두고 호강을 하셨는데 첫째는 음식을 맡고 둘째는 옷 수발 셋째첩은 주로 방안에서 수발을 하셨다고 합니다.
꼬마 외숙모님은 나도 처녀로 시집 왔다. 하시며 옛 집안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신 분입니다.
정실부인이 친정으로 가서 귀한 아들을 낳았는데 그만 자다가 눌려 숨이막혀 죽었다고 합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엄마 몸에 눌려 압사 당했습니다.
이때부터 고부간에 갈등과 외삼촌의 방황이 시작 되었다고 합니다. 이 부인의 별명이 밍충이로 시집에서 불렀답니다. 자손 귀한 집에서 큰 야단이 나고 결국 외할머니께서 며느리를 내치셨다고 합니다.

결과는 외조모님이 양반 댁 규수로 새 며느리를 두번째로 들이셨다고 합니다.
외 조모님이 돌아가신 후에 첫째 부인이 집으로 들어오니 재취 부인이 첩인 것을 알고 낙심하여 시름시름 앓다가 몇 년 후에 죽었다고 합니다. 이 둘째 분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세살도 안된 아기 때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외삼촌은 첫째 부인에게 남매를 두셨습니다. 영수와 진수 남매입니다.
외할아버지 청풍 김씨 김춘식(1873-1917)씨는 서울에서 10대 부자라고 합니다.
저의 큰오라버니께서 서울에 복덕방 하시는 분이 김춘식에게 왕이 참깨 3천석을 납품하라 하시니 “3개월만 말미를 주십시요 “하고 참깨 삼천석을 3개월 후에 전부 납품했다고 전합니다.
“ 땅이 많은 부자”라고 했다 합니다.

보통 부자는 3대가 가는데 외가는 5대째 부자로 사셨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증손자 김정묵(이조판서)의 4남이 고조 김기순(1799-1835), 증조는 김병선(1818-1878)이고 조부는 김 익찬(1846-1909) 조부 김익찬이 사마조임금부도사셨는데
도사댁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어멈님게서 할아버지가 금부도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외조부(1973-1917)께서는 사마좌임군부주사 가끔 주역 책을 보셨는데 그 책을 큰 외삼촌 (유근)이 10대에 보고 주역에 흠뻑 빠져 읽는 것을 아시고 모두 빼앗아 불살라 버리셨다고 합니다. 그래도 큰 외삼촌은 몰래 구해다 읽어 그때부터 부자간에 틈이 생기기 시작 하였다고 합니다.
또 외조부님은  춘천 땅을 돌볼 양자를 당질로 하실려고 생각하셨습니다. 이분은 저의 어머니의 팔촌 오라버니인데 키가 크시고 인물이 좋으셨습니다. 저도 한번 본적이 있습니다.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외삼촌은 돈을 물 쓰듯 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미관도 통째로 빌려 연회를 하고 거의 날마다 기생파티를 즐기셨다고 하는데 그 중에 김씨라는 기생이 김 유근이 부자인 것을 알고 어린 여동생을 첩으로 소개를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씨로 만석꾼이란 소문이 날 정도로 부자였다고 합나다.
서울에 처음으로 비행기가 생겨 시내 한 바퀴 도는데 그 때 돈 10원인데도 사촌 동생 유석(당시10세)이 까지 태워주셨다고 고맙다고 하신 기억이 납니다.
외삼촌이 저의 당숙 유원준씨를 의형제를 맺어 일본 유학을 보내드렸고.
배 다른 삼촌(김찬익의 서자) 결혼까지 시켜드렸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친구끼리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네가 아들을 낳고 내가 딸을 나면 사돈하자고 하여 맺어진 짝이 있었답니다.
외삼촌의 조부가 돌아가신 후 외삼촌이 할아버지 친구분의 딸을 수소문하여 찾아 혼인을 시켜 드렸다고 합니다. 혼인 때 집도 사주시고 살림 일체 화초장까지 드려주시고 전답도 할아버지께서 주라는 것보다 200석을 더 떼어 주셨다고 합니다. 후일 이 삼촌은 의사가 되고 유정이 연희전문 다닐 때 이 댁에 맡기고 춘천으로 내려갔는데 그의 삼촌이 푸대접하여 방황하였다 전합니다 장조카인(유근) 나의 큰 외삼촌을 금치산까지 한 분입니다 .이 삼촌은 의처증이 있으셔서 살아 생전 서로가 왕래를 잘 하지 않았습니다. 꼬마 외숙모님은 삼촌댁과 같은 처지라 자주 왕래를 하셨습니다만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한 듯 합니다.
외 삼촌은 누이동생들에게도 서예 사군자 문인화를 일류 선생님을 모셔다 집에서
독 선생을 두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셋째 누이 흑석동 저의 이모님은 머리가 좋아 글씨도
잘 쓰시고 남보다 빨리 익히시고 마당 가 나무에 올라 밖을 구경 하시기를 좋아하셨답니다.
전라도에 가서 화선지를 사서 마차로 서울로 운반하여 홍두깨로 다듬어 사용했다니 사치스럽기 까지 합니다
덕분에 내 어머니는 화조 서예를 잘 하셨고 시집 오신 후 시댁에서 문중 여문장가란 칭호를 들으셨습니다.

또 춘천 철도 길을 내는데도 많은 땅을 기증 했다고 합니다
외가가 망하게 된 동기는 큰 와삼촌의 낭비벽도 있지만 독립만세 사건과 미두와 누이들의 결혼 실패 사망 유정의 분당 사건을 듭니다.
큰외삼촌이 친구 18명과 사냥을 가서 일본 서장과 옷을 바꿔 입고 독립 만세를 불렀는데 모두 잡혀갔다 합니다. 큰 외숙도 옥살이를 하셨습니다.
그때에 외가에서 옥바라지를 했고 매일 닭 백숙 18 사람 분씩. 매일 잡혀간 사람을 위하여 감옥으로 요리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때 집사가 일을 맡아 했는데 아마도 그때에 그가 많은 재산을 축냈다고 합니다.
집 동쪽에 손병희씨 댁이 있고 박영호댁도 이웃이었다고 합니다. 손병희 박영호 그분과도 친교를 하셨을거라 생각을 하며 할아버지 김찬익씨 아버지 김춘식씨가 의병들의 재정을 담당한 것 처럼 큰 외숙이 18명분의 외식을 감옥으로 보내게 하신 것은 자연스러운 집안 내력이 아닐가 합니다. 만세사건 후의 재산이 많이 축났다고 합니다.
가장 큰 타격은 미두를 했다가 많은 손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당시에 일인들은 곡물을 본국으로 안전하게 수송하기 위하여 인천에 미두취인소를 설치 했는데 미두는 지금의 증권 비슷한 것이라고 보면 이해가 간다고 하셨습니다. 미두에는 선물도 있어서 물품이 없어도 팔고 살 수 있는 제도였다고 합니다. 당시에 일인들은 많은 한국인들을 미두시장에 끌어 드리어 이러한 방식에 익숙지 못한 내국인이 손해를 보았다고 합니다.
큰외삼촌의 고민은 정실부인의 부족함과 둘째부인의 병고 누이들의 결혼 실패. 단명, 재산의 손실. 술을 먹을 수 박에 없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외가가 춘천으로 이사 하면서 유정을 삼촌댁에 맡기고 갔는데 저녁이 늦으면 대문을 안 열어주어 유정이 대문간에 쭈그리고 앉아 밤을 새며 박에서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유정이 집으로 보낸 편지는 편지지 20장에 돈 한자가 20장씩 써 있었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있나 하고 부리낳게 돈을 마련하여 보냈다고 합니다.
꼬마 외숙모님의 말씀을 빌면 누이들 다섯을 출가시키는데 돈을 요구 하는 사돈들이 있었고 하나 같이 누이들이 젊어 요절 불행한 삶을 사니 술을 안 마실 수 없었다고 합니다
누이 여섯에 서고모가 세분 아홉 명에게 300석씩 떼어주면 재산이 뭐가 남겠느냐고 꼬마 외숙모님이 들려주셨습니다
첫째 누이는 김치에 깨소금을 넣었다고 시집에서 내치고 일찍 사망 하셨고. 둘째 누이는 자손이 없어 소박 맞고 혼자 살며 피복 공장에 다니다가 정인이 생겨 정인이 처가의 돈을 탐낸 듯 합니다. 그 당시에는 여자는 수절을 해야 하는데 시집에서 내쫓긴 것도 흉이 되었는데 정인이 생겼으니 오죽 망신스러웠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둘째 누이는 동작동에서 살았다고 동직이 라고 불렀습니다.
넷째 누이 동생은 시댁의 양가가 정승댁이었다고 합니다. 누이는 재산 떼어오라고 시모에게 구박받고 병들어 친정에 돌아와 죽었습니다. 아저씨는 병든 넷째 동생이 불쌍하다고 업고 마당 가를 서성이셨다고 합니다. 이 넷째 누이는 얼마 후 친정에서 죽었습니다
 다섯 째 누이는 시골 농촌에서 시집살이와 고생을 한다 하여 마음 아파하셨다고 전합니다.
이 다섯째 누이가 저의 어머님이십니다 막내 외삼촌 유정과 저의 아버님 (유세준)과는 친구십니다. 재동공립보통학교 선후배가 되시고 유정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십니다. 저의 부친은 중앙고등보통학교로 학교를 달리합니다.
또 막내인 여섯 째 누이 부흥은 숙명교에 다니셨다고 언니(옥근)이 말하고 희자(사촌동생)은 동덕에 다녔다고 하는데 언니의 말이 맞을 거 같습니다. 언니가 동덕에 다녔으니까요.
막네 누이 부흥은 인물 좋고 머리 좋아 공부도 잘하고 인기 있는 여학생이었는데 신문에 기사가 난 후 남학생으로부터 편지가 오고 남학생이 집까지 따라다녀 외삼촌이 꾸중을 했더니 그 때부터 말없는 자페증에 걸렸다고 합니다. 수녀원에 가서 수녀가 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명문가에 자존심 강하고 마음 따뜻한 분의 변심입니다
막내 외삼촌 유정이 사흘이 멀다고 서울에서 돈돈하며 돈 보내라는 편지를 보내면
막내 동생 유정을 사랑하시는 큰 외삼촌께서 산을 팔고 전답을 팔아 돈을 보내주곤 하셨다고 합니다.
 형과의 분가 사건 이후 큰 외삼촌은 재산 처분과 동시에 윗대 조상의 묘 30여기를 모두 화장을 약 한 달간 하셨다고 합니다. 어떤 묘는 시신이 썩지 않은 조상도 있었고 한 묘는 파헤치니 오색 찬란한 서광이 비쳤다고 합니다.
그때 다시 묘를 잘 묻었다면 하는 이쉬움을 꼬마 외숙모가 말하곤 했습니다. 춘성군에서는 검은 연기가 약 한달간 끝치치 않고 났다고 합니다. 조상의 묘를 파헤치면 집안 망한다는 소리가 지금도 춘천 지방에 떠돕니다.
조상묘를 모두 화장을 할 때의 유근 외삼촌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조상에게 미안하고 자신도 처절한 아픔을 느꼈겠지요
조상의 묘를 화장을 하고 큰 결심을 합니다.
재산을 팔아 3등분하여 유정에게 한 몫, 큰 부인과 아들 딸에게 한 몫, 꼬마 외숙모에게 한몫으로 나누어 주고 당신은 방랑생활을 하셨습니다. 그 재산을 유정은 다 써버렸고 큰부인은 집을 사고 꼬마부인은 죽을 때까지 그 재산을 꼭 쥐고 살면서 나중에는 세방으로 이사도 다니면서 살다 돌아가셨습니다.
6.25전에 미대사관저에서 하우스걸로 일을 하시며 뽀죽 구두를 얻어다가 초등학교 4 학년인 저의 형제들에게 주셨습니다. 저는 신기한 뽀죽 구두를 처음 보는 것이 었고 시골에서 친구들과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던 기억이 납니다.

큰 외삼촌이 저의 집에 오시면은 조상의 묘를 화장 한 것을 잘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외조부께서 아들을 못 미더워 하신 것처럼 외삼촌도 아들 영수를 믿지 아니 하셧습니다.
그 것이 조상을 욕 먹이지. 묘 관리도 못하고 잘했지 내가 화장을 깨끗이 잘했어. 라고 외삼촌이 어머니께 하신 말씀을 여러 번 들었습니다. 유정이도 화장 잘했지…
외삼촌은 100년을 앞서간 분입니다.
외삼촌의 아들 영수는 남매를 두고 있습니다
와사촌 영수는 우리 집 시골 동수매기에서 가끔은 오래 묵으셨습니다
강원도 빨갱이 대장이란 말을 어렸을 적 들었습니다.
감옥에서 나오면 몸이 퉁퉁이 부어 몇 달간 우리 집에서 요양하다가 가셨습니다. 어느 해 가을에 동수맥의 격자문의 창호지를 바르시던 기억이 납니다. 아들이 내 동생 인근과 동갑인데 산토끼를 부른다고 자랑 하셨습니다. 6.25가 나고 그의 처내게는 외사촌올캐가 검은 다리 저의 집에서 딸하나를 데리고 와서 저의 집에 묵다가 갔습니다. 그 후 소식을 모르고 지냈는데 수복 후에 만났습니다.
외사촌 영수 오라버니는 아예 호적 본적지를  어딘가 옮기고 숨어 사셨습니다.
강원도 여기 저기에 김익찬 증조부, 김춘식 조부 부친 김유근의 명의로 된 땅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고 합니다. 도청에 근무 하던 분과. 변호사들이 영수(유근의 자)를 찾습니다. 땅을 주인에게 찾아 준다는 구실이지만 땅을 찾으면 반반씩 나누자는 사업 제의가 옵니다. 현재의 땅을 부치는 사람은 역으로 사기죄를 몰아 공격하여 감옥가게 생겼다고 하더군요. 조부의 명의 이전 안된 땅을 많이 찾아 부자가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의 사촌 오라버니 김영수는 새 삶을 사시다가 몇 해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의 첫 부인에게 귀한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께서는 친정 붙이라고 손자를 사랑하셨습니다. 그가 우리 집에 오면 무엇이 없어졌습니다. 6.25 직후 어려울 때 입니다. 쌀 살려고 놓아둔 돈이 없어지고 재봉틀 머리도 없어졌습니다. 당숙 댁에 가서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살아계신 할머니의 부조금도 받아가고 팔이 부러졌다고 기브스를 하고 가서 돈을 타갔다고 합니다. 흑석동 이모님은 그 아이는 청풍 김씨가 아냐.  우린 그런 사람 없어 하시고 아예 인간 취급을 생전에 하지 않으셨습니다. 큰 외삼촌의 손자에게 아들 형제가 있는데 공부도 잘하고 똑똑하다고 합니다.
그 아이들이 가문을 일으킬 훌륭한 자손이 되었으면 합니다. 큰 외삼촌의 손자가 장성하여 증조부 김유정 행사에 옵니다. 큰 외삼촌도 유명을 달리하셨지만 증 손자들을 대견하게 여기시고 사랑 해 주 실 겁니다.
내 어렸을 적 큰 외삼촌이 부부 동반하고 오실 때는 서울에서 꼬마 외숙모가 문방구를 하실때입니다
그 후 방랑생활을 하셨는데 전국을 떠 돌다 동수맥에 오십니다. 외삼촌은 키가 크시고 다리를 저시지만 당당하게 보이며 건장하시며 유식하십니다.
얼굴은 불콰 하시고 수염을 길게 기르시어 도인 같았습니다.
어머니와 외삼촌은 우애가 깊으시고 가정사를 말씀 나누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외삼촌이 오시면 새 옷을 준비하여 드리셨습니다.
겨울에도 그 분은 찬물로 세수를 하시고 생쌀을 잡숫고 솔잎을 드신다고 했습니다
어떤 때는 한 달간 머물다 가시고 때로는 옷만 갈아 입으시고 바랭이 보따리를 어깨에 메시고 훌쩍 떠나셨습니다. 우리들 생질에게 천자문도 써 주시고 가르치시고 저희들을 아끼셨습니다. 보따리 속에는 지필묵과 주역 책 한 권 갈아 입으실 입성 한 벌이 전부입니다.
재미있는 일화는 남산에서 흑석동 셋째 누이네 조카들을 데리고 가셔서 너 저기가 잠간 있어라 하시며 점을 보시어 과자를 사주셨답니다. 어렸을 적 불살라버렸다던 주역 책이 가끔은 방랑생활에 소용이 되었나 봅니다. 아저씨는 생질들 과자 사줄 돈과 한끼 식사 이외는 더 앉아 계시지 않고 그 자리를 뜨셨다고 흑석동 이종 사촌이 전해 줍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나 그런 사람 아니오 하고 시치미를 떼셨답니다
누가 현재에 남루 한 옷 차림의 이 분을 서울의 삼공자라고 하겠습니까
큰 외삼촌을 6.25 때 산골 거문다리 집에서 마지막으로 뵈었습니다. 다섯째 누이 거문다리 식구들이 6.25 후의 생사가 궁금하여 오셨습니다.
저의 큰 오라버니는 철경이고 둘째 오라버니는 국군, 큰언니는 선생, 북에서 보면 저의 집은 반동분자 집안입니다.
서울에서 친인척이 저의 집에 30여식구가 머물었습니다. 식량이 부족하여 저의 어머니는 외삼촌의 며느리 영수 처와 여주 이천에 리아카를 끌고 가서 쌀과 호밀을 사다가 아침에는 밥을 지어먹고 점심과 저녁에는 호밀 죽을 쑤어 애나 어른이나 한 대접씩 먹었습니다. 그 때 저는 초등학교 6년생이었습니다. 서울이 회복 되자 친척들은 서울로 돌아가고 고모댁 식구만 남었습니다. 6.25때 북의 협조한 사람들은 반대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큰 외삼촌이 고생하는 어머니께 한입이라도 줄여야 한다고 섬봉이도 내보내라고 하셨습니다.
머슴 섬봉이는 오랫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섬봉이가 떠나자 우리 형제들은 산에 가서 땔 나무를 해 와야 했는데 낫질을 하지 못하니 썩은 소나무 뿌리만 발로 차서 쓸어지는 것만 자루에 담아 끌고 왔습니다. 가을이 되자 친척들이 떠나고 추수하여 햇쌀밥을 지어먹었습니다.
얼마나 맛이있던지 그 맛을 잊을 수 없습니다.
큰 외삼촌은 예의 바른 분이라 저의 집에 오셔도 안채에 안 들어 오시고 사랑채에 머물다 가셨습니다
안채는 주인의 자리라고 사양 하셨습니다.
저의 오라버니가 철도경철에 있을 때도 찾아 오셨다고 합니다.
부산 피난 시절 방송국으로 김유선(사촌 누이동생)을 찾아가시어 어머니의 행방을 물으셨다는 것이 마지막 소식입니다.
서울 개운사의 친구분들과 술을 드시던 곳이 있었는데 후에 개운사의 건물 한 채를 지어 기증 하셨는데 문설주에 김유근의 유자가 6.25동란에 총에 맞아 지워진 상흔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정말 기인이십니다. 젊으실 때 책을 많이 읽으시어 학식이 높으시고 주역을 공부하시어 중용을 아시는 분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흔적 없이 사라지신 분 제 눈에는 도인으로 밖에 표현 할 수 없습니다.
부자였다고 자랑하지 않고 가난해졌다고 비굴하지 않으시고 떳떳하게 자신의 방식대로 당당히 사시다가 흔적도 없이 살아지셨습니다.
돌아가신 날은 기억 못하나 천상에서 안락한 영생을 맞이 하시기를 빕니다.
생질 유필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