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외삼촌 김유정
(1907년 1월 11일 1937년 3월 29일사망) 유필근
소설가 김유정은 저의 막내 외삼촌이 되십니다.
금년 김유정 탄생 100주년을 맞아 김유정의 이야기를 외가와 친가의 증언을 토대로 정리하는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김유정은 청풍 김씨 김춘식과 청송 심씨 사이에서 8남매 중 7째로 1907년 1월 11일 서울 운니동 저택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외 할아범님 태몽에 앞 마당 한가운데가 쩍 갈라지더니 오색 찬란한 용이 하늘로 솟아 오르더랍니다.
용의 비늘 하나하나에 은방울이 달렸는데 절렁절렁 소리가 나면서 용이 하늘로 솟아 오르다가 그만 갑자기 땅에 떨어지며 땅 속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외할아버지께서는 그 꿈을 꾸신 후 꿈 해몽하시기를 유정이 후일에 유명 해 질 것이나 단명 할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대성 통곡을 하셨다고 어머님가 제게들려주셨습니다..
김유정은 그의 부친의 용꿈처럼 찬란히 방울 소리를 내며 하늘을 오르다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김유정은 태어나실 당시는 왕자 부럽지 않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100칸이 넘는 큰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운니동 집에서 태를 운반 하는 것을 흑석동 이모님이 보셨다고 합니다.
그가 어렸을 적에는 온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최고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외 할머님은 유정의 나이 7살1915년 3월 18일에 돌아가시고 외 할아버님은 그의 나이 9살 때 1917년5월23일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어렸을 적 횟배앓이를 하여 외할아버지께서 담배를 피우게 하시어 배만 아프면 담배를 피우셨다고 전합니다.
유정 외삼촌은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형님 누님들, 그리고 유모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고 하는데 부모님을 무척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큰 외삼촌은 어린 유정과 꼭 겸상으로 식사를 하셨고 어린 유정에게 조금이라도 소흘하게 대할까 바 집안 단속을 엄히 하셨습니다
제사를 지낸 후 젯상 음식을 큰 목판에 반을 담아 계집종들이 맞들어 유정의 방에 갔다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린 유정이 아래 것들에게 나누어 주고 친구 분들에게 나누어 주셨다고 합니다
큰 외삼촌은 유정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시고 흡족해 하셨고 또 무척이나 동생을 아끼셨다고 합니다.
유정이 태어난 집은 100칸이 넘는 운니동 집인데 나랏님이 특별히 허락하셔서 지은 집이라고 합니다. 그의 윗대 조상 중에 부원군이 있었고 나랏님이 하사한 농토가 춘성군과 홍천에 몇 만석지기 땅이 있었다고 합니다. 운니동 집에서 외할머님는 세간이 따로 있어서 아랫 것들이 더운물을 떠다 바치면 세수도 목욕도 혼자서 세간에서 하시며 따님들도 어머니의 속살을 보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예절 바르고 깔끔한 분이셨다고 합니다.
신하의 집은 99칸을 넘으면 아니 되는데 100칸이 넘는 집에서 살면 좋을 듯 싶으나 집과 모든 것은 자기 분수에 맞아야 하겠지요. 너무 집이 크고 밤이면 마당에 큰 고목 나무에서 귀신 우는 소리가 들리고 어떤 날은 콩 볶는 소리도 들렸고 솥 뚜껑이 솥 안으로 들어 가는 변고도 있고 하여 도깨비 장난이라고 하셨습니다. 운니동 집은 집터가 너무 세어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우환이 끈이지 않아 무서우셨다고 저의 어머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유정은 어렸을 적부터 한학과 붓글씨 하모니카 바이올린을 배웠다고 합니다. 유정은 서울의 일류 선생을 맞아 개인지도를 오랫동안 받았다고 합니다.
큰 외삼촌는 무엇이든지 최고 일류로 하시던 분이라 누이들에게도 각각 독 선생을 두고 글과 그림을 익히시게 하셨고 당신도 거문고까지 사사 받으신 분입니다. 한 예로 한지를 전라도에서 마차로 사다가 홍두깨를 올려 다듬이를 한 후 사용했다고 전합니다.
유정이1920년12살에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921년 3학년으로 월 반을 했다고 합니다. 한학 덕분에 공부를 잘했다고 합니다.
운니동 집을 팔고 숭인동 관철동으로 더 작은 집으로 집을 줄여 이사를 합니다 .숭인동 집은 동편에 손병희씨 댁 상춘원, 남서쪽에 박영호 북쪽은 과수원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 서장과 옷을 바꿔 입고 독립만세를 불러 18명 모두 감옥에 갇혀 옥바라지 한 일을 꼬마 외숙모는 말합니다. 부마 박영호 후실이 그의 남동생을 다섯째 누이 흥선을 중매하였는데 외삼촌이 후실 집안이라고 반대 하셨다고 합니다.
연희전문학교에 문과. 입학과 동시에 집안이 춘성 고향으로 이사를 하면서 삼촌댁 봉익동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가세가 기울어진 것은 큰 외삼촌 유근 아저씨의 낭비벽과 주색, 난봉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독립만세 사건의 뒷돈과 미두라고 합니다. 김유정의 조부(김익찬)께서는 사마좌임금부도사를 지내신분이고 을미년 1895년 민비 사해 사건 이후 춘천 의병 5천명의 재정을 지원한 가문의 장이셨습니다.
큰 외숙이 남루한 차림으로 바랑이 등짐 하나 메고 절룩이며 전국을 떠돌아도 그 분의 표정은 당당하고 밝으셨습니다.
유정의삼촌은 연대 외과 의사인데 성격이 까다롭고 정신 병원에 입원을 하시기도 한 의처증 환자였다고 합니다. 삼촌댁에 기거를 할 때 숙비도 제때에 못 주고 삼촌댁은 재촉을 하고 유정은 미안해 했다고 합니다. 거기에 장조카를 금치산까지 하니 더욱 사이가 멀어졌다고 합니다. 옛날 결혼 풍습은 서손은 서손끼리 결혼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큰외삼촌이 봉익동 삼촌을 결혼 시키고 집장만 화초장 일체를 드리우시고 할아버지가 주라고 하신 재산 보다 200석을 더 떼어주셨다고 꼬마 외숙모가 전합니다
삼촌댁에서 유정이 얹혀 산 것은 비참에 연속이었습니다. 밤 늦게 들어가면 대문 빗장이 잠겨 있어 문밖에서 밤을 새울 때가 허다했다고 전합니다. 이 때에 기생 박녹주를 짝 사랑하던 때라 박녹주가 저녁에 나가 소리를 하고 밤 늦게 돌아오는 일을 하니 기생을 뒤 따라다니는 유정이 집에 일찍 돌아올 수 없었겠지요. 이 때에 장안에 기생과 대학생의 연애 사건이 파다하게 퍼져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박녹주는 연회장이나 명월관에 나가 남도 창을 하며 전라도 재벌 김경중 (김성수씨의부친)의 첩살이를 하는 기생이었습니다.
큰외삼촌이 돈을 마련하여 보내면 박녹주에게 줄 선물을 사고 기생이 만나주지 않으면 절망 때문에 한잔씩 나중에는 폭주를 했다고 합니다. 박녹주 남동생에게도 누님과 연결해달라고 돈을 주고 뜯겼다는 소문도 있습니다. 연상의 녹주에게 처음은 선생에게, 당신, 나중에는 너, 협박 조로 혈서까지 썼다고 박녹주가 회고록에서 말합니다. 저의 남편이 명창 박녹주를 만난 어느 연회장 자리에서 김유정이 처외삼촌이요 하니까 그렇게 유명해 질 사람인줄 알았으면 잘 해 줄 걸 했다고 합니다.
짝사랑은 길게 가지 않고 1년이 지나 끝났습니다,
0.4초만 상대의 눈 빛만 바라보아도 사랑이 이루워진다 하나 유정은 박녹주를 아프게 짝사랑으로 끝냅니다. 유정은 남달리 도파민 홀몬이 작용을 못했나 봅니다.
사랑은 유동체. 어머니를 사랑 했고 기생을 짝 사랑했고 신여성을 사랑했고 학교선생을 사랑했고 동경여대생을 사랑했고 그의 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났습니다.
동경여대 출신인 00를 사랑하시어 누님인 내 어머니에게 여러 번 부탁을 하셨다고 합니다. 어머님은 사돈간은 혼인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타이르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에서는 어떻게 하던지 결혼을 시키려고 중매를 서고 돈을 마련하여 주면 사흘이 멀다 하고 그 돈을 다 없앴다고 합니다.
그는 결혼을 해서 가정을 갖는 것보다 친구와 술을 좋아했나 봅니다. 저의 어머님은 학교 여선생과 선을 보이신 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결혼 예물로 채단도 준비하고 금반지도 준비 했는데 그것도 가지고 나가 다 없앴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님은 가끔 유정의 소설 중 반은 내가 소재를 제공 하셨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니는 광주군 산골(山谷)로 시집 오셔서 서울과의 생활이 많이 차이가 나셨습니다. 처음 누님을 뵈러 온 유정이 새참을 이고 들로 가신 것을 보고 울고 갔다 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온 친정식구도 울었다고 합니다.
유정 아저씨는 항상 한복을 애용하셨습니다. 흰 두루마기를 제일 좋아하셨는데 가끔은 검은 두루마기도 입으셨다고 합니다. 저의 어머님이 친정에서도 유정의 옷 수발을 맡아 하셨다고 합니다.
저의 어머님도 문맥이 곱고 문중 여문장가라는 소문이 나신 분이셨습니다.
어머님도 몰락해가는 친정 집안일이 소설 보다 더 파란 많다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써야지 써야지 하시면서 정작 한 줄도 쓰지 못하고 많은 아픔을 가슴에 담고 돌아가셨습니다
저의 고향의 이름이 산골입니다. 저의 고향에서도 노란 동백꽃으로 머리 기름을 짭니다. 봄이면 머슴이 생나무를 베어오면 거기에 노란 동백꽃 가지와 연분홍 진달래 봉오리도 섞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도 처음 산골나그네를 읽고 광주군 저의 고향 산골 이야기인줄 알았습니다 시골의 정경은 어디나 비슷한 곳이 많이 있습니다. 마을 어구에 술집이 있고 물레 방앗간이 있고 산에는 진달래 동백꽃이 피고 노란 송화 가루가 날아 물에 뜹니다. 인심도 순박합니다. 초겨울이 오면 안잠쟁이가 들어오고 얼개미와 채반. 똬리. 풀솔을 팔러 오는 아이 딸린 전라도 아낙이 옵니다. 어느 인심 후 한 댁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되면 돌아갑니다.
외삼촌이 신춘문예 당선 상금을 가지고 누님인 저의 어머니에게 선물을 사가지고 오셨다고 큰언니에게 들었습니다
담홍색의 본견 저고리 감과 아버지께는 만년필 언니에게는 검은 벨벳 원피스. 그때 언니는 여섯 살 때라고 기억합니다. 나는 어머니가 서울 가시면 그 담홍색의 저고리를 붙잡고 울던 생각이 납니다.
유정 외삼촌은 어린 조카 딸에게 예쁜 옷을 사 입히고 솔이 울창한 소따배기를 산책했다고 언니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옥근아 네 신랑 감은 내가 구해주마 하셨다고 하는데 언니 여섯 살 때 아저씨가 돌아가셨습니다. 아저씨가 산골에 오시면 별채에 묵으셨다고 합니다. 별채는 아마 저의 부모님이 동생을 위 한 작업실이 아닌가 합니다.
유정 아저씨는 바이올린과 하모니카를 잘 불러 산골에 내려오시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하모니카와 바이올린을 켜셨다고 저의 큰 오라버니 (좌근)께서 전합니다. 동네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하여 유정 삼촌만 산골에 오시면 동네사람들이 저의 마당에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학창시절에 하모니카 YCK(김유정의 약자)밴드를 조직하여 방송국에 나가 하모니카 독주를 했다니 놀라운 솜씨이지요. 바이올린 연주도 방송국에 나가 연주 할 정도로 잘 켜셨다고 합니다.
유정아저씨가 병이 깊어 저의 아범님께서 서울 정릉에 계신 삼촌을 업어 차에 태워 모셔왔다고 합니다. 그 때 저의 아범님이 전차를 세워 담배 여러 갑을 사셨다고 합니다. 유정이 담배를 좋아하니 산골 가서 피라는 배려셨겠지요. 두 분은 처남 매부 사이며 재동공립 보통학교 동문이십니다.
저의 부모님은 시골에서 요양을 하며 몸보신 시킬 생각으로 모셔왔다고 합니다.
유정아저씨의 시중을 들기 위하여 조카 딸(진수 큰 외삼촌의 딸)을 딸려 보냈다고 합니다
그가 이상에게 보낸 편지에”닭을 몇 마리 고아 먹으면 ….구렁이를 몇 마리 과 먹으면 내 병이 나을 거라고 보낸 편지에 김유정의 글이 있습니다.
내 어렸을 적 우리 집 바깥 마당가 방아간 맞은편에는 뱀탕이 있던 기억이 납니다. 내 아버님도 덕분에 몸보신을 하셨나 봅니다. 어머니는 백방으로 유정을 위하여 애를 쓰셨지만 유정의 병은 점점 더 악화 되었습니다
폐병도 객혈을 하지만 치류가 심해서 거기가 터지면서 출혈이 심하고 고통이 심했다고 어머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유정은 폐결핵도 폐결핵이지만 정작 치류로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유정아저씨는 요양 중이라도 일본 유학 가고 싶은 꿈을 키웠다고 합니다.
고통 중에도 계속 열심히 글을 쓰셨는데 돌아가신 후 그의 원고는 안희남이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저의 외가에서는 안희남을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가 유정의 사후 원고를 모두 가지고 갔고 일부 안희남이 발표한 작품 중에 문체가 김유정의 작품 같다는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안희남은 월북작가입니다.
외삼촌 유정이 돌아가실 때에는 저의 오빠(좌근5학년우근3학년)들을 강제로 서울로 보내시고 언니 둘은 안방에 가두어 두셨는데 창호 문을 찢고 관이 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언니가 전합니다.
큰 외삼촌과 저의 아버님이 유정의 시신을 서울로 모셔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을 하고 한강물에 재를 흘려 보냈다고 하십니다.
큰 외삼촌은 내가 잘 했지. 그때 화장을 잘했어. 결혼을 시켰더라면 …아마 그가 더 살았을까? 아마 몽달귀신을 면했을 거라는 아쉬워서 하신 말씀일까? 운명은 재천명인 것을 ..
김유정은 휘문고등보통학교 5학년때의 키가 5.67척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키가 크시고 인물으 훤했다고 합니다.
저의 고종사촌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춘천의 김유정 동상이 꼭 너의 아버지 같다고 그럴리가 있겠습니까만 확인은 해봐야지요.
그는 3년 동안 주옥 같은 글을 30여편 쓰셨습니다
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김유정이 교과서에 나와서 고등학교 교장님신 저의 백부님께 김유정이 어떤 소설가냐고 여쭈니 일류는 못되고 삼류다 별 볼 일 없는 소설가다 하셨고 저의 친동생이 독일에 있을 때 도서관에서 김유정 작품집 “동백꽃” 중 “형”을 읽으니 큰외삼촌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야 부끄러워서 김유정이 외삼촌이라고 말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소설과 실제 인물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작품 구성을 할 때 인물의 성격 설정을 어떻게 할까 고심 합니다. 김유정이 흑석동 셋째 누님이나 다섯째 누님이신 저의 어머니의 대한 글은 없습니다. 동생 부흥이도 없습니다. 조카 영수도 없습니다. 밍충이 형수도 꼬마 맹추 형수도 있을 법한데 없습니다. 저의 큰외삼촌은 딴살림을 밖에 나가 차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귀공자로 자란 그가 해학적이고 비속어 토속적인 글을 썼을까 궁금합니다. 아마도 그 것이 보통인과 다른가 봅니다.
천재적인 문학성이 내재해 있었나 봅니다. 이제는 제가 김유정의 문학을 이해합니다. 내가 성장 하여 일찍 요절한 외삼촌 유정을 위하여 약 병아리라도 고아 들렸으면 하고 마음 아팠던 때가 있었습니다. 약 병아리가 저의 숙제였는데 이제는 김영기 선생님 덕분에 해결 되었습니다. 춘천의 김영기선생님 덕분에 김유정의 문학상 기념관 동상 강원도 춘천에서 만들어 기념하고 있어 고맙게 생각합니다. 김영기 선생님이 김유정 전집을 만드실 때1965년경 저보고 원고를 정리 해달라고 하신 기억이 납니다. 소양강 변의 김유정 문인비는 우리 나라 최초의 문인비입니다.
의암댐 근처에 나는 광주로 간다고 쓰신 글귀를 60년대 중반에 보았습니다. 아직도 그 자리에 그의 글이 남아 있는지 궁금도 합니다.
김유정이 저의 외삼촌이라는 것이 영광스럽고 보다 많은 문인에게 사랑 받은 영원한 문인 김유정 큰 별이십니다.
김유정탄생100주년에
계절문학 2008년 여름 통권 3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