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평론 오병이어
유화백이 또 오병이어( 五餠二魚)라는 제목의 그림을 한 점을 보내왔다. 받자마자
고개를 갸우뚱 했다. 성화인가. 장막 안에 펼쳐진 그윽한 신화는 신비스럽기만
했다. 거역할 수 없는 절대자의 참뜻이라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현신하였다.
기독교에서는 기적을 말할 때 오병이어를 예로 든다. 떡은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다, 놀랍
게도 이 아이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자기의 떡을 예수님께 드렸다. 기적은 여
기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예수님께 드린 보리떡은 히브리어로 ‘마슈나’다. 이 떡은 거칠어
사람이 아닌 짐승이나 먹는 먹이였다. 두 마리의 작은 물고기도 드렸다. 이 고기는 ‘이크
스’이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들은 큰 고기는 집으로 가져가고 너무 작아서 먹을 수 없는
고기는 해변에 버린다. 이 아이가 드린 물고기는 주은 이크수스’다. 어린아이가 예수님 말
씀을 듣겠다고 하니, 부모가 해변에서 버린 고기를 주워 도시락을 싸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5천명을 배부르게 먹이고 아직 열두 광주리가 남아 있었다. 이것이 이병이다.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가장 큰 기적이 일어났다. 오병이어의 기적에는 믿고 따르는 순종
이 있었다. 희생하는 사람을 통해서 축복의 역사가 일어났다. “제자들에게 명하사 모든 사
람이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무리지어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앉는 곳이 야외예배당이고 공양 밥이 오병이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며 찬송
이 시작된다. “밥은 백성의 하늘. 밥이 보약. 쌀 한 알이 귀신 여럿 쫒는다.”고 하
였다. 오병이어는 예수님이 차린 삼시세끼 밥상이다. 선지자는 갈릴리에서 양들
에게 밥을 먹이고 밥상머리 교육을 시킨 것이다.
그림과 사진
그림은 실물보다는 색깔도 윤곽도 느낌도 흔들리는 모양도 한참 떨어진다. 동영상은 말 할 필요도 없이 정지된 화면도 그림 보다는 낫다. 그런데 사진 보다 왜 그림을 높이 살까. 그림에는 화가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또한 화가의 눈으로 보이는 세계를 화가의 해석으로 바꾸고, 아름다운 것을 훨씬 더 아름답게 창조하기 때문이다. 모네의 해바라기와 사진 속 해바라기를 비교해 보면 사진 속 해바라기는 목이 댕겅 잘린, 생명이 없는 절화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모네는 해바라기에 그럴듯한 생명을 불어 넣어주었다.
켄버스에 나타내는 시도는 믿음이라는 숭고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성화로 태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성화의 참뜻을 모르는 사람도 풍기는 이미지만 봐도 옷깃을 여미게 된다. 오방이어 그림 속에는 예배당과 설교가 들어있다.
명화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한 화면에 들어 있다. 천천히 구석구석 살피면서 이야기의 단서를 찾아 나가야 한다. 자신이 그림 속에 들어간다면 어느 위치로 가고 싶은지. 제일 잘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그림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들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상상을 덧붙여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림 속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것이 명화를 감상하는 순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