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전시/2015년 전시

미술 평론 오병이어

 

미술 평론 오병이어

 

 

 

유화백이 또 오병이어( 五餠二魚)라는 제목의 그림을 한 점을 보내왔다. 받자마자

 

고개를 갸우뚱 했다. 성화인가. 장막 안에 펼쳐진 그윽한 신화는 신비스럽기만

 

했다. 거역할 수 없는 절대자의 참뜻이라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현신하였다.

 

기독교에서는 기적을 말할 때 오병이어를 예로 든다. 떡은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다, 놀랍

 

게도 이 아이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자기의 떡을 예수님께 드렸다. 기적은 여

 

기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예수님께 드린 보리떡은 히브리어로 마슈나. 이 떡은 거칠어

 

사람이 아닌 짐승이나 먹는 먹이였다. 두 마리의 작은 물고기도 드렸다. 이 고기는 이크

 

 

이다.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들은 큰 고기는 집으로 가져가고 너무 작아서 먹을 수 없는

 

고기는 해변에 버린다. 이 아이가 드린 물고기는 주은 이크수스. 어린아이가 예수님 말

 

씀을 듣겠다고 하니, 부모가 해변에서 버린 고기를 주워 도시락을 싸 주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5천명을 배부르게 먹이고 아직 열두 광주리가 남아 있었다. 이것이 이병이다.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가장 큰 기적이 일어났다. 오병이어의 기적에는 믿고 따르는 순종

 

이 있었다. 희생하는 사람을 통해서 축복의 역사가 일어났다. “제자들에게 명하사 모든 사

 

람이 떼를 지어 푸른 잔디 위에 앉게 하시니 무리지어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앉은지라”.

 

앉는 곳이 야외예배당이고 공양 밥이 오병이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하며 찬송

 

이 시작된다. “밥은 백성의 하늘. 밥이 보약. 쌀 한 알이 귀신 여럿 쫒는다.”고 하

 

였다. 오병이어는 예수님이 차린 삼시세끼 밥상이다. 선지자는 갈릴리에서 양들

 

에게 밥을 먹이고 밥상머리 교육을 시킨 것이다.

 

 

 

 

 

그림과 사진

 

그림은 실물보다는 색깔도 윤곽도 느낌도 흔들리는 모양도 한참 떨어진다. 동영상은 말 할 필요도 없이 정지된 화면도 그림 보다는 낫다. 그런데 사진 보다 왜 그림을 높이 살까. 그림에는 화가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또한 화가의 눈으로 보이는 세계를 화가의 해석으로 바꾸고, 아름다운 것을 훨씬 더 아름답게 창조하기 때문이다. 모네의 해바라기와 사진 속 해바라기를 비교해 보면 사진 속 해바라기는 목이 댕겅 잘린, 생명이 없는 절화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모네는 해바라기에 그럴듯한 생명을 불어 넣어주었다.

켄버스에 나타내는 시도는 믿음이라는 숭고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성화로 태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성화의 참뜻을 모르는 사람도 풍기는 이미지만 봐도 옷깃을 여미게 된다. 오방이어 그림 속에는 예배당과 설교가 들어있다.

명화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한 화면에 들어 있다. 천천히 구석구석 살피면서 이야기의 단서를 찾아 나가야 한다. 자신이 그림 속에 들어간다면 어느 위치로 가고 싶은지. 제일 잘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그림 속 주인공이 누구인지. 그들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상상을 덧붙여 작품을 감상해야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림 속의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것이 명화를 감상하는 순서이다.

그림의 본질은 미()를 추구(追求)하는 데에 있다. 아름다운 것을 더욱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 화가(畵家)이다. 아름다움에 여러 가지 파격(破格)을 더하면 작품이 빛을 더 발한다. 화가가 가진 뜨거운 정렬(情熱)을 온통 작품을 통해서 불태울 줄 아는 화가가 좋은 그림을 그린다. 화가는 남다른 심미안을 가져야 한다. 가끔은 두견새 목의 피처럼 짙게 토해내는, 생명을 바꿔도 아깝지 않은, 명작들이 탄생한다. 인상파 그림은 사람의마음을 포근하게 해 주는 마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