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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어린 시절

추억의 편린 57-2 625 사변

6.25 사변 (57-2)

 6.25 난리가 났다.

 국군이 한강 백사장에서 많이 죽어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어머니는 군인이 작은 오빠를 걱정하였다. 또 서울에 사는 큰 오빠가족을 걱정하여 그날로 걸어서 서울을 가셨다. 큰 오빠는 철도 경찰로 들어갔고 셋째아기가 태어 난지 백일도 안 된 올캐가 아이 셋을 데리고 허둥대고 있었다고 한다. 시어머니는 작은 아기를 업고 올캐는 둘째 아이, 외할머니는 큰아이를 업고 산곡으로 내려왔다. 대청마루에 아가 그네를 매고 조카아기들이 울면 흔들어 주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 었다.

 조카가 셋. 큰 애 이름은 미래인데 병이 들어 걷지를 못하고 기어 다니었다. 그 다음 둘째 사내아이는 영리하여 아장아장 걸어 다니면서 대추나무 밑에서 대추도 주워 먹고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언제나 바지주머니가 불룩하였다.

 내 동생이 둘인데 초등학교 2학년생은 8, 막내는 다섯 살.

동생들이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조카 셋이 기저귀를 차고 울어 대는 데는 모두 온 가족이 신경을 써야했다.

 6.25 전쟁이 나니 서울에서 큰댁 할머니가 우리 집으로 피난을 오셨다. 또 외가의 외사촌 오빠 댁이 딸을 업고 피난을 왔다. 밥 먹는 객식구가 10이 넘고 어떤 때는 20명도 되었다. 닭을 잡아도 3마리는 잡아야 했는데 닭을 잡으면 동네 친척 할머니들이 소문을 듣고 먼저 대청마루에 올라 고기 국을 기다리었다.

양식의 떨어지면 어머니는 어머니의 물건인 옷가지며 시계 반지를 팔아 쌀로 바꾸셨다. 동네에서 쌀이 부족하면 어머니는 리어커를 끄시고 올캐와 외사촌 올캐를 데리고 여주 이천으로 쌀을 사시러 갔다.

여름이라 호박이나 콩을 넣고 밀가루를 넣어 풀떽이를 만들어 아이나 어른이나 한 대접씩 먹었다. 큰댁 할머니는 언제나 배가 고파하셨다.

큰언니는 산곡초등학교 선생이었는데 학교에서 나오라고 해도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말하자면 우리 집은 반동분자집이다. 큰오빠가 경찰. 작은오빠가 국군. 언니가 선생.

선생언니가 떡 장사를 했다. 조용한 시골이였는데 피난민이 많이 다녔다. 쌀을 불리어 절구에 찧고 손바닥만 한 송편을 만들어 한 길가 오고가는 피난민에게 팔았다. 송편 소는 풋콩이나 팥을 넣었다. 떡이 익으면 우선 큰할머니가 잡숩고 싶어 하시니 할머니 한 개 들이고 꼬마들 한 개씩 주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했다. 집에 노는 손이 있어 올캐들이 떡을 만들고 선생 언니는 팔기만 하면 되었다.

또 하루는 고골에 가서 참외를 사다가 팔았는데 고골까지 가는 길도 험하고 무거운 것을 가지고 오는데 힘에 겨워 단 하루만 하고 참외 장사를 덮었다.

우리식구들은 양반이라 장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어머니도 올캐도 전 부침개라도 만들어 한길에 나가 팔면 되는데 그런 것을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