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삶/어린 시절 썸네일형 리스트형 추억의 편린 엄마가 서울 가시면 10 엄마가 서울 가시면 10 어머니가 서울 가시면 횃대에 벗어 놓으신 어머니의 다홍저고리를 붙들고 내가 울어댔다고 했다.이 다홍저고리는 유정 아저씨가 원고를 받아 어머니께 최초로 선물 하신 옷이다. 여름에 감자를 캐고 알이 잔 감자를 썩히어 녹말을 만들면 물 갈아 줄 때 감자 썩는 냄새가 온 집안에 퍼져 코를 찔렀다.그때에 마침 일인이 우리 집에 배를 얻으러 왔다.어머니는 서툰 일어로 “닥상 게무시가 아리마스.”하고 쫓아내신 기억이 난다. 가을에 상한 배는 썩은 곳을 도려내고 큰 가마솥에 넣고 배 엿을 고우셨다. 이 엿은 구리 빛이 도는 검은 색으로 감기약이 되었다.근처 사방 30여리에 소문이 나서 겨울이면 배 엿을 환자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셨다. 추억의 편린 10 계속 추억의 펀린과수원집. 8 과수원집. 8 농사를 지으며 과수원을 하는 우리 집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 거렸다. 과수원 배 밭에는 퇴비로 콩깻묵을 바수어 배나무 주위에 고랑을 파고 묻어 주었었다.방, 마루에서는 부녀자들이 배에 씌울 봉지를 붙이고 바깥마당가 대형 가마솥에서는 소독약이 끓어 냄새가 진동 했다. 밭에서는 배 열매를 솎아내며 봉지를 씌웠다.내 어렸을 적집에서는 30여명의 식솔이 북적 거렸다. 농촌으로 시집오신 어머니는 언제나 바쁘셨다.추억의 편린 8.계속 추억의 편린할아버지 생신 때 찍은 가족 사진 7.할아버지 생신 때 찍은 가족 사진내 어릴 때 사진은 친할아버지 생신 때 큰댁 대청에서찍은 가족사진이 있다. 1940년 내 아버님은 오른쪽 둘째 줄의오른 쪽에서 두 번째.내 어머님은 왼쪽으로부터 4번째 아기 안은 부인이 우리 어머니. 엄마 품에서 자는 아기가 필자 정능에서 물놀이 하다 넘어지다.내가 젖먹이일 때 서울 정능에서 물놀이 하다 미끄러져 다친 적이 있었는데 아직도 내 뒤통수에는 그 때 얻은 흉터가 남아있다.추억의 편린 7 계속 나의 입태일 계산 6 나의 입태일 계산 61937년 3월 29일 막내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삼 개월 후 내 어머니는 나를 임신하셨다. 어머니의 슬픔은 가슴 가득. 소리없이 우시며 일상으로 돌아오셨지만 아직도 유정이 별채에 있는 듯 아른거려 유정을 가슴에 담고 새 생명을 잉태 하신 것 이었다. 나의 입태일은 내가 태어난 날이 1938년 6월 28일 일주가 신묘(辛卯) 일이 되니까 어머니 뱃속에서 246일 있었느냐? 306일있었느냐? 따라서 결정을 내가 예측 해본다면 내가 말을 돌전에 하고 열달 전에 걸었다하니 어머니 뱃속에서 306일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 뜻에서 나의 입태일은 1937년 8월 27일.나는 여름에 태어났다. 어머니 뱃속에서 영양분을 충분히 받아먹어 건강하게 태어났다.영리하여 잘 넘어지지도 않고 말도 빨리하.. 추억의 편린 아버지의 정원 아버지의 정원 우리 부모님의 결혼식 날 신부 댁 앞마당의 석류가 주렁주렁 열리어 보기에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석류 두 개를 따갔다고 큰 외숙이 화를 내셨다고 했다. 내 아버지는 결혼하여 과수원을 크게 하시며 농사를 지으셨는데 과수원을 더 크게 하셨다. 바깥 마당가에는 대추나무 두 그루와 집앞 밭에 석류나무 여 나무 그루, 여러 종류의 감나무를 심으셨고 사랑채 앞에는 모란과 포도나무와 도라지를 여러 고랑 심으시어 아버지의 꽃밭으로 만드셨다.집 아래 넒은 텃밭은 배를 심고 집근처에는 복숭아 .자두 포도를 심으셨다. 벼농사는 샘재의 수리시설이 잘된 곳에 논이 있었고 추수를 하실 때에는 아버지는 샘재의 농가에서 추수가 끝날 때까지 묵으시다 오셨다. 어머니는 시집오신 후 그 이듬해 첫아들을 낳으시어 온.. 아버지의 처남 김유정 추억의 편린 5.아버지의 처남 김유정 내 아버지와 막내 외삼촌 유정과는 결혼 전부터 친구가 되셨다. 우애가 돈독하셨던 유정은 누이를 보러 산골에 자주 왔다. 유정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다섯째 누이를 의지하였는데 다섯째누이가 시골로 출가한 것이다.다섯째누이는 평소 유정의 옷 수발을 도왔고 흥선 누이에게는 어머니의 모습이 느껴져 더욱 다정하게 지냈다. 어머니처럼 따르던 누이가 시골로 시집을 가서 유정은 틈만 나면 산골 누이 집을 찾았다. 유정이 서울로 돌아갈 때에는 울며 돌아갔다고 했다. 서울 아씨가 밭고랑의 일꾼들에게 줄 참을 이고 가시는 모습을 본 것이었다. 집에 돌아가 밭고랑에 참을 이고 갔다는 말을 전하고 온 집안이 울었다고 전했다. 아버지는 막내 외삼촌 유정이 산골에 오면 글을 쓰라고 뜰 건너에 .. 추억의 편린 아버지의 정원 아버지의 정원 우리 부모님의 결혼식 날 신부 댁 앞마당의 석류가 주렁주렁 열리어 보기에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석류 두 개를 따갔다고 큰 외숙이 화를 내셨다고 했다. 내 아버지는 결혼하여 과수원을 크게 하시며 농사를 지으셨는데 과수원을 더 크게 하셨다. 바깥 마당가에는 대추나무 두 그루와 집앞 밭에 석류나무 여 나무 그루, 여러 종류의 감나무를 심으셨고 사랑채 앞에는 모란과 포도나무와 도라지를 여러 고랑 심으시어 아버지의 꽃밭으로 만드셨다.집 아래 넒은 텃밭은 배를 심고 집근처에는 복숭아 .자두 포도를 심으셨다. 벼농사는 샘재의 수리시설이 잘된 곳에 논이 있었고 추수를 하실 때에는 아버지는 샘재의 농가에서 추수가 끝날 때까지 묵으시다 오셨다. 어머니는 시집오신 후 그 이듬해 첫아들을 낳으시어 온.. 추억의 편린 부모님은 중매로 결혼하셨다 추억늬 편린 2. 나의 부모님은 중매로 결혼하셨다. 부모님의 결혼은 오촌 당숙 유 원준 (兪元濬)씨의 중매로 이루어졌다고 했다.큰외삼촌 김유근은 서울의 부잣집 자제들과 특별한 교우관계를 맺고 계셨다 그 중 광주군 중부면에 사는 유 원준과 의형제를 맺어 일본 유학까지 보내 주어 다녔다고 한다.큰외삼촌은 여동생들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었다.큰 외숙은 누이들이 많아 고민이 많았던 것이다. 큰 외숙 아래로 여동생이 여섯 명이 있었는데 셋째까지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결혼을 시키셨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넷째 누이부터는 큰 외숙이 주관하여 혼인을 시키게 되였다 오승지 댁으로 시집을 간 넷째 누이는 처음에는 시어머니가 새 며느리에게 잘하더니 점점 친정집 재산을 떼 오라고 은근히 시집살이를 시키었다. 오승지댁은 ..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17 다음